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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드 노트

사외이사의 순정

허인혜 기자

2025-09-04 08:15:30

대우조선해양의 마지막 사외이사였던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여전히 선장이다. 강단에 선 지 수십년이지만 일정 기간마다 갱신해야 자격이 유지되는 1급 항해사 면허를 꼬박 이어가고 있다.

은퇴 후 크루즈 선의 선장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대형 상선의 선장으로 시작해 법학을 공부해 해상법 전문가가 된 인물이다. 평생 바다 위의 삶이었지만 여전히 애정이 깊다.

이사회 당시 회사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주목한 지점은 계약 구조였다. 조선업은 사이클 변동성이 크다. 게다가 발주자의 시장으로 불리던 당시에는 조건이 더욱 불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비테일 계약. 발주자가 선박 인도 시점에 대금을 몰아서 지급해 조선소는 수년간의 건조 비용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

그는 이 구조가 대우조선해양의 유동성을 얼마나 압박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다. 해운사가 자금을 여유롭게 선수금으로 제공해야 조선사의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제언했다. 법률 전문가로서뿐 아니라 해운 산업을 두루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이었다.

선수금 환급보증(RG)에도 주목했다. 조선소는 발주자로부터 선수금을 받지만 건조를 완료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줘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사는 도산 직전이다. 은행 보증이 없다면 불가능한 구조다. 그는 이사회 논의에 그치지 않고 입장을 해운업계에 전달하는 한편 관련 학문 연구를 이어갔다고 했다.

산업은행의 지분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산은의 지분 유지가 필요하다고 봤다. 결국 산은은 2대주주로 남았다. 김 교수는 이를 대우조선해양이 살아남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기대했다. 민간 경영이 실패할 경우에도 정부가 일정 지분을 보유하면 다시 심폐소생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외이사는 통상 법률, 회계 등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맡는다. 하지만 김 교수 사례는 또 다른 중요한 역량 하나를 깨닫게 했다. 현장에 대한 애착을 지닌 이사가 있을 때 이사회의 논의가 훨씬 입체적으로 전개된다는 점. 결국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단순한 전문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실무를 꿰뚫고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 더해져야 이사회는 비로소 거수기가 아닌 현실적인 논의에 다가선다.

마음을 정량화해 점수로 매길 수는 없지만 한 산업을 깊이 이해하고 애정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되므로, 사외이사의 순정은 곧 기업을 향한 관심과 책임감이다. 기업의 지속 가능성은 이런 애정에서 출발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