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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드 노트

조용한 반대

이돈섭 기자

2026-05-12 13:14:14

며칠 전 밤 늦게 모 사외이사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모 그룹의 한 계열사 소속 전직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복귀하기로 했고 그를 추대하기 위한 안건이 이사회 테이블에 올라왔는데 해당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복귀 안건에 반대했다는 내용을 취재한 직후였다. 원고지 7매 분량의 이메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부담스러우니 날 주목하지 말라'였다.

이 사외이사는 언론이 주목하면 소신 발언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짧은 식견과 어설픈 소신이지만 건전한 상식과 기준에 맞으면 찬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한 바 있다'면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간의 소신발언은) 나의 의사결정이 세상의 주목을 크게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덧붙였다.

생각해보면 이 사외이사에게 주목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직 회장은 과거 수백억원 횡령 사건으로 실형 선고를 받았고 지난해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그룹 수뇌부에 친인척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보니 그의 복귀를 결정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 이사회 차원의 판단은 이와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상법 개정으로 회사뿐 아니라 주주 전체 나아가 이해관계자 전체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이사회 입장에선 그의 복귀를 평가하는 세간의 목소리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외이사가 취재에 응하지 않아 명확한 반대 사유는 전할 수 없지만 이사회에서 소신을 내비쳤다는 사실은 뚜렷했다. 타사 이사들도 그가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이사회 실제 논의 분위기가 노출될 경우 이사회 속에 내재돼 있는 이사진 사이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개인의 무용담으로 확대 재생산된다면 그 또한 곤란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사회 안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내비쳤는지는 결국 이사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다. 더군다나 개별 이사가 이사회 안건에 어떤 의사를 냈는지는 기업 정기보고서 상 공개되고 있다.

며칠 뒤 전직 회장은 무보수 경영을 선언했다. 이사회 의중을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과정이 어땠든 이 회사 이사회는 결과적으로 경영진을 견제하는 데 성공한 셈이 됐다. 그가 이메일에서 취재 거부 의사 대신 본인과 이사회가 이 안건을 얼마나 숙고했는지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시장은 이 회사 이사회 독립성과 거버넌스 시스템을 완전히 재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