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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독립이사'의 진정한 의미

원충희 서치앤리서치(SR)본부 부장

2025-11-20 08:04:22

대형 금융그룹의 전직 사외이사를 만나 들었던 얘기다. 사외이사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차기 CEO를 선정했는데 그날 회의만 5시간이 걸렸다. 격론과 조율의 과정이 길었냐고? 아니다. CEO의 연임을 거의 결정한 상태에서 4시간 이상 연락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직전 새 정권이 들어섰고 CEO는 압수수색과 수사를 받았다. 정부 영향력이 강한 업종 특성상 CEO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외이사들은 당연히 퇴진 압력이라 생각하고 뭔가 시그널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끝내 연락은 없었고 CEO는 예정대로 연임됐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외이사가 외풍의 창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사외이사 제도는 오랫동안 오너 체제에 초점을 맞춰 설계됐다.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지배력, 즉 정치·관료·규제 권력으로부터의 영향력에 대한 방어 장치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뤄져 왔다.

은행, 통신 같은 규제산업이나 정부로부터 민영화됐지만 여전히 국가 영향력이 남아 있는 소유분산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영향력이 상당한 업종에서 CEO 인선은 '정치'와 맞닿는다. 이사회가 선임권을 갖고 있어도 사외이사 개인의 휴대폰은 정관계 라인과 연결돼 있다. 이 때문에 정치권 또는 고위관료 출신이 사외이사로 기용되는 사례가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사외이사는 회사 외부의 또 다른 권력과 연결된 채 이사회에 들어오게 되고 독립성을 오히려 훼손하는 구조가 된다.

최근 KT CEO 선임을 둘러싼 혼란은 이런 구조적 문제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대표이사 임기가 도래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다. KT의 이사회 시스템이 '더보드 500대 기업 평가'에서 2년 연속 10위에 오를 만큼 잘 갖춰졌음에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사외이사 제도가 경영진 견제에 맞춰져 있고 외풍에 대한 방벽은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외이사의 독립성은 결국 '어디서 왔느냐'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사외이사 후보 추천인을 공개하고 기관투자자 및 소액주주 추천제 도입, 외부 추천 비중 확대 등 선임 경로부터 '라인'을 걸러내야 한다는 제도 개선 요구가 커지고 있다. 누가 추천했고, 누구에게 의존하게 되는지를 구조적으로 끊어내는 것이 독립성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다.

또 다른 핵심은 법적 보호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사외이사가 외풍이나 이해상충 압력을 거절하는 과정에서 결정한 사안을 폭넓게 보호하는 '비즈니스 저지먼트 룰(Business Judgment Rule)'이 발달해 있다.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한 판단이라면 사외이사는 소송 위험에서 벗어나고 외풍에 흔들리지 않으며 온전히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 규정의 명문화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올해 상법 개정으로 사외이사(Outside Director)라는 명칭은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로 바뀌었다. 단지 회사 밖에 있는 이사가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이사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는 오너·경영진에 대한 독립성뿐 아니라 정치·관료·사회적 외풍으로부터의 독립성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명칭은 바뀌었다. 그러나 진정한 독립성은 제도적 장치와 이사 선임 구조의 변화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한국 기업지배구조는 이제 '외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다. 독립이사가 단지 형식이 아니라 진짜 독립성을 갖춘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이제부터가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