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덕죽 셰프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이 폐업 위기를 넘긴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폐업을 지시했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의 마음을 돌린 이는 장녀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이었다. 이 고문은 후 셰프가 주방장을 맡은 뒤 바뀐 요리를 맛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부친을 설득했다. 이 창업회장은 "인희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이라고 자서전에 남길 만큼 맏딸을 신임했다.
이 고문은 1991년 삼성그룹에서 한솔제지를 분리·독립해 한솔그룹을 일궜다. 한솔그룹은 2세 형제 경영을 거쳐 3세 경영 체제로 넘어갔다. 화학 계열사인
한솔케미칼을 이끄는 3세 경영 주자는 이 고문의 장손녀인 조연주 부회장이다. 조 부회장은 보스턴컨설팅그룹 컨설턴트, 빅토리아시크릿 애널리스트 등으로 경험을 쌓고 2014년
한솔케미칼 기획실장으로 합류했다. 이듬해 사내이사로 선임돼 전문경영인과 주요 의사결정을 함께한다.
조 부회장은 일반적인 재계 3세 경영인과 다른 출발선에 섰다. 본인 스스로
한솔케미칼 최대주주에 오를 지배력을 확보해야 한다. 부친인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이 만들어준 지배력(5.57%)만으로는
한솔케미칼 대주주에 오르기 어렵다. 지난해 조 회장이 지분 일부를 현금화해 개인 대출을 갚으면서 국민연금에
한솔케미칼 최대주주 자리를 내줬다.
조 부회장이 당장 부친 지분(4.76%)을 모두 물려받아도 현재 국민연금이 보유한 지분(13.07%)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조 부회장은 우회로 대신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지배력을 늘리는 정공법을 택했다. 그는 2023년부터 이사회 결의를 거쳐
한솔케미칼 장기 성과에 연동한 양도 제한 조건부 주식(RSU)을 부여받고 있다.
조 부회장이 한두 해 RSU를 지급받는다고 지배력이 급격히 늘지는 않는다. 꾸준히 RSU 가득 조건을 달성하고, 넉넉한 성과 보수를 받아 지분을 매입해야 자력으로 최대주주에 오를 수 있다. RSU 지급은 중장기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성과 보수 산정은 단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기준점이다. 성과로 증명하겠다는 조 부회장의 행보는 '책임 경영'이 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