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개정안은 단순한 법조문 변경이 아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해묵은 과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제도적 응답이다.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균형을 맞추고자 이사회 등 지배구조를 대대적으로 손보겠다는 정부의 선언이기도 하다. 시장도 반응했다. 투자자의 시선은 상법개정이 일으킬 실질적 변화에 집중되고 있다. theBoard는 권한과 책임, 경영과 견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사회 패러다임의 전환 가능성을 짚어봤다.
상법 개정안의 취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다. 한국만 값이 싸게 매겨진다는 판단은 국내 상장사들의 주주 보호정책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이어진다. 결국 상법 개정안에서 핵심 과제로 다뤘던 다섯 가지의 안건은 모두 '국제 기준'에 맞추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 중 끝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한 법안은 대규모 상장법인의 집중투표제 의무화다. 그만큼 양당과 재계의 논의가 치열했던 법안이기도 하다. 집중투표제 의무화 도입을 추진한 쪽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일반화된 제도라고 본다. 경제단체 등 반발하는 편에서는 주요 선진국 중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곳은 없다는 주장으로 맞선다.
글로벌 주요 국가들의 선례를 눈여겨볼만 하다. 주마다 규정이 다른 국가, 의무화 후 폐지한 국가, 의무화 후 완화했다가 다시 제도를 강화한 국가까지 바로미터가 다양하다.
◇도입 155년된 미국, 정관으로 선택…'과반의결' 일반적
집중투표제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다. 출발이 늦었던 한국에서도 외환위기를 거친 직후 상법을 개정했으니 약 27년이 지났다. 해외에서는 1870년대부터 이미 도입 시도가 있었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집중투표제는 국내 증시에서만 뜨거운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미국도 논의에 논의를 거듭해 왔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주마다 별도의 주 법률로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입법 형태는 의무 혹은 비의무 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갈래로 나뉜다. 외신과 해외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정관에 규정이 있을 경우 집중투표제를 허용하거나, 우리나라처럼 정관에 제외 조항이 없으면 기본적으로 적용되도록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캘리포니아주는 비상장 기업에게는 집중투표제를 강제한다. 다만 주주간 협약을 통해 동일방식 투표를 의결하면 집중투표제 도입을 우회할 수 있다. 기업들이 주로 법인 주소를 두는 델라웨어주는 기본적으로 후보 1인당 1표(one vote per candidate option) 제도를 채택하되 선택지를 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등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은 단순투표·과반의결제를 시행 중이다.
집중투표제를 선택하지 않은 기업들 중에서는 과거 집중투표제를 시행했다가 폐지한 곳도 있다. 세계 3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대표적이다.
마이크론은 2015년 주주총회를 통해 집중투표제 폐지를 위한 정관 개정안을 의결했다. 마이크론은 주주총회 안건을 설명하며 △누적투표제는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을 보유한 소수주주에게 유리하고 △또한 소수주주가 과반수 의결권 보유자의 의사에 반하는 파괴적인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봤다.
그러면서 S&P500과 포춘500대 기업 대부분이 집중투표제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10년 전 문서이지만 외신과 최신동향 연구 등을 종합해보면 이 기조는 더 약화되기보다는 강화됐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6월 발표한 '상법 일부개정법률 의원발의안에 대한 의견' 리포트를 통해 "1949년까지 미국 22개주가 회사에 집중투표 의무를 두고 있었으나, 1950년 이후 적대적 인수위협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임의규정화"했다고 부연했다.
◇일본은 의무화→의무화 폐지…정관 '옵트아웃'제
일본은 1950년대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가 1974년 의무제도를 폐지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권용수 건국대학교 교수에게 의뢰해 2월 발표한 '일본 집중투표제 의무화 폐지 배경'을 보면 일본은 1950년 미국식 이사회 제도를 도입하며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
집중투표제 청구요건은 단독주주권(1주만으로 청구 가능)으로 규정하고 정관으로 집중투표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도록 했다. 지분의 4분의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집중투표 실시를 청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한 배경은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서였다. 자본 유치를 목표로 외국인 투자 제한을 없애면 일본 내 기업의 경영권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정관으로서 집중투표제 적용을 배제할 수 있는 옵트아웃(Opt-out) 제도로 바꿨다.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집중투표제를 요구할 수 있지만 기업이 정관으로 거부가 가능하다. 자연스럽게 일본 기업들은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배제를 정관에 명시해 집중투표제를 피했다.
의무화 폐지 이후 외국계 자본이 집중투표제를 요구한 사례도 있지만 기각됐다. 홍콩의 행동주의펀드 오아시스 사례다. 오아시스는 2018년 도쿄거래소에 상장된 GMO인터넷에 투자해 지분 7% 이상을 보유한 바 있다. 인터넷 주주서한으로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했지만 GMO인터넷이 정관을 이유로 거절했다.
◇도입→완화→재강화한 대만, 소액주주 지배력 증가
집중투표제를 법제화한 국가도 물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경제인협회와 법무법인 광장이 공동으로 주최한 세미나의 발제 내용을 보면 러시아와 중국,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일부 국가가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 다만 이 설명은 'OECD 국가 중에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한 나라가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
법제화한 나라들의 소액주주들은 지배력이 증가했을까. 대만의 사례를 참고할만 하다. 대만은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가 옵트아웃으로 변경한 뒤 다시 강행규정으로 바꾼 독특한 역사를 지녔다. 1960년대 도입 초기에는 의무규정이었다가 2001년 기업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옵트아웃으로 바꿨다.
대만의 전자부품업체 야교(YAGEO)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의무화의 도화선이 됐다. 1위였던 야교가 2위 타이(Tai‑I)를 인수하고자 사모펀드 KKR과 손을 잡고 지분을 사들였는데 타이가 집중투표제를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반을 이용해 인수 시도를 무력화했다.
대만 정부는 건전성과 소수주주 의견 반영을 이유로 합병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타이의 승리였지만 주주평등과 견제 논의의 시발점이 돼 다시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부활하게 됐다. 제도적으로는 소수주주의 지배력이 강화된 셈이다.
출처=한국경제인협회
◇독일·이탈리아, 집중투표제 의무화 아니지만 주주 이사 선출
선진국에서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사례는 흔하지 않다. 다만 다른 제도를 통해 소수주주 추천 이사를 선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경우는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사회의 독립성을 매우 강조하는 독일은 집중투표제를 법령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원이사회제도를 채택해 이사회 구성원 자체가 경영진과 주주, 노동자 등으로 세분화돼 있고 그 선출 과정도 다양해서다. 집중투표제를 도입해 소수주주 이사 선임 장치를 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각 이해관계자가 두루 포진해 있다는 의미다.
이탈리아의 경우 소수주주가 추천한 후보 중 1인을 이사회 구성원으로 선출해야 한다. 다만 대주주와 특수관계인도 투표권을 부여받아 소수주주 후보들 중 지지자를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