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의 시간은 대체로 의사결정이 끝난 뒤에 시작된다. 이미 내려진 결정이 법에 맞는지, 그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따지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사회에 들어가면 시간의 방향이 달라진다.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무엇을 확인하고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남궁주현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겸
DL이앤씨 독립이사
(사진)가 이사회에 참여한 뒤 가장 크게 달라졌다고 느낀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밖에서 이사회를 볼 때는 이미 의사결정이 끝난 뒤의 모습을 주로 봤다"며 "이사회에 참여하고 나서는 결과가 적법하고 정당한지를 보는 데서 나아가 과정의 적법성과 정당성을 위해 사전에 무엇을 확인하고 어떤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지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법률 전문가인 독립이사의 역할도 이 과정에서 생긴다. 사업 수행을 위한 법적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소수 의견으로 남은 견해를 이사회가 다시 꺼내 검토할 수 있다. 실제 회사가 최종 결정 전 관련 의견을 재확인한 경우도 있었다.
남궁 이사는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다수의 의견을 내는 구조는 아니다"라며 "소수 의견의 역할을 때로는 법률 전문가들이 이사회에서 제기하기도 하고 그런 과정이 합리적인 경영판단을 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회사 이익 넘어 주주간 이해관계까지…합병·분할서 부각
최근 상법 개정은 이런 과정의 중요성을 더 높였다는 게 남궁 이사의 판단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포함되면서 기업이 살펴야 할
대상도 넓어졌다.
남궁 이사는 "과거에는 회사의 이익이 된다고 하면 사실상 큰 틀에서는 검토가 끝나면 되는 것이었다"며 "그런데 상법이 개정되면서 그 거래가 주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주주들 사이에 이익과 부담이 어떻게 배분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되는 지점이 생겼다"고 말했다.
남궁 이사는 개정 상법의 충실의무가 실질적으로 문제 되는 상황은 제한적이라고 봤다. 대부분의 경영판단에서는 회사의 이익과 주주 이익이 같은 방향이기 때문이다. 반면 합병·분할처럼 회사에는 이익이 되더라도 주주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달라질 수 있는 거래에서는 개정 상법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법적 적용 범위와 달리 기업의 실무상 검토 범위는 훨씬 넓어질 것으로 봤다. 남궁 이사는 "회사 입장에서는 사실상 의사결정을 하는 모든 영역에서 특정 주주를 너무 유리하게 하거나 불리하게 하는 상황으로 이해관계 충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지를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법 개정 이후 의사결정 과정이 이전보다 밖으로 드러나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주요 거래를 결정한 기업들이 이사회·특별위원회의 검토 내용과 논의 과정을 상세히 공개하는 흐름이다. 남궁 이사는 "그런 게 없었으면 결정적인 결론만 놓고 보는 것"이라며 "똑같은 논의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정보의 제공이 조금 더 많이 이뤄지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합리적 경영판단은 존중해야"…판례 쌓이기까지 장기전
남궁 이사는 충실의무 강화와 별개로 합리적인 경영판단은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충돌이 없는 순수한 사업적 영역이라면 상법 개정만으로 경영판단에 대한 법원의 태도가 달라질 필요는 없다고 봤다.
그는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충분한 논의를 한 뒤 합리적으로 판단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이사회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이사들이 위험이 있는 의사결정을 피하게 되고 그 비용도 역시 회사와 주주가 부담하게 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사안이라면 엄격하게 봐야 한다. 필요한 정보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 단순히 경영판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이 경우에도 결과만이 아니라 판단 당시 어떤 정보와 절차를 거쳤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기준이 자리 잡으려면 판례 축적이 필요하다. 남궁 이사는 의미 있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2~3년, 기업이 활용할 수 있을 만큼 판례가 유형화되려면 10년도 더 필요하다고 봤다.
남궁 이사는 이 과정을 주주와 회사가 조항의 적용과 해석을 놓고 다투는 '조용한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세부적으로 이 조항을 어떻게 우리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주주 측일 수도 있고 회사 측일 수도 있고 각자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나 아니면 안 나올 질문 해야"…독립이사의 조건
독립이사의 역할을 놓고는 적극론과 소극론 중 '중간'이라고 했다. 핵심은 정보의 정도다. 사업을 처음 접한 이사는 제3자 입장에서 전문 분야를 점검하고, 초기부터 지켜본 이사는 축적된 정보로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그때그때 상황과 자신의 전문성, 정보의 취득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어느 정도 적극성을 가질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DL이앤씨의 이사회 문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남궁 이사는 "이사회 논의가 굉장히 자유롭고 오히려 독립이사들이 더 말을 많이 하는 경우도 상당 부분 있다"고 말했다. 처음 독립이사를 맡을 때는 건설회사 이사로서 부담하게 될 책임을 걱정했지만 실제 참여한 뒤 우려가 크게 줄었다고 했다. 그는 "들어와서 보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의사결정을 많이 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법이나 제도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낀 문제로는 정보의 질, 사후평가, 독립이사가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가 세 가지를 꼽았다.
정보의 질과 관련해서는 독립이사가 제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봤다.
DL이앤씨에서는 이사회에 참석한 경영진이 사업의 전체 히스토리부터 경영진이 무엇을 고민했는지까지 상세히 설명한다고 전했다. 그는 "전체 히스토리부터 그와 관련해서 고민했던 것까지 쭉 상세하게 설명한다"며 "이사회 경험이 많은 분이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굉장히 이례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사후평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와 법령·판례·기준을 준수했더라도 결과가 나쁘면 책임을 물으려는 경향을 우려했다. 법적 책임을 지지 않더라도 구성원이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면 의사결정이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궁 이사는 "그렇게 되면 결국 회사는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은 독립이사가 실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가다. 그는 "'내가 회사에 과연 필요한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라며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의 문제 제기는 상관이 없는데 모든 의사결정에 그냥 말이 많아지면 그건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이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선임되는 것과 실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남궁 이사는 그 기준으로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질문을 할 수 있느냐"를 꼽았다. 그런 질문을 하려면 회사와 사업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독립이사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해야 하고 회사 역시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는 "일단 회사와 그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