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WCD Korea)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여성 이사의 진출 확대를 넘어 실질적인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여성 이사가 한 명일 때와 두 명 이상일 때 이사회 활동 경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나왔다. 여성 이사의 독립적 판단과 차세대 여성 경영인 육성 방안도 주요 과제로 제시됐다.
WCD 코리아는 지난 28일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비전 있는 이사회와 포용적 성장: 아시아·태평양 이사회의 미래를 그리다'를 주제로 창립 10주년 기념 포럼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한국과 일본, 필리핀, 몽골, 호주, 뉴질랜드 등 아태 지역 기업인과 주한 외교사절 등 120여 명이 참석했다.
WCD 코리아는 2016년 9월 여성 이사 40여 명이 모여 출범한 비영리 단체다. WCD 글로벌 네트워크의 74번째 지부로 출발해 현재 회원은 180여 명으로 늘었다. 2020년 자본시장법 개정 당시에는 해외 입법 사례를 조사하고 국회에 입법을 제안하는 등 여성 이사의 진출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에 힘을 보탰다.
◇여성 사내이사 4.1%…경영인 육성 경로 확대해야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WCD Korea)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개최한 'WCD APAC Global Forum'이 10월 28일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가운데 주요 내외빈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WCD 코리아.
박영숙 와이즈파트너즈 사장은 이날 'K-거버넌스의 도전과 기회'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여성 이사의 진출이 사외이사에 집중된 현실을 짚었다. 박 사장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의 여성 사외이사 비중은 26.1%였지만 여성 사내이사 비중은 4.1%에 그쳤다.
박 사장은 기업 내부에서 경영 경험을 쌓은 여성들이 사내이사로 진출할 수 있도록 후보군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기존 여성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내 위원장을 맡는 등 리더십을 강화하는 것도 과제로 제시했다. 여성 창업가와 기업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 경영인들을 이사회와 연결하고, 현직 여성 이사들이 이들의 성장을 돕는 멘토링 방안도 제안했다.
이사회가 제도적 요건을 충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다. 박 사장은 배당과 자사주 소각, 장기투자 등 자본배분을 결정할 때 투자수익률과 재무 여력 등을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회가 어떤 대안을 검토했고 왜 해당 결정이 전체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사들이 충분한 정보와 발언권을 갖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때 이사회는 더 강해진다"고 말했다.
인공지능(AI) 전환에 따른 이사회의 감독 역할도 강조했다. 박 사장은 AI가 업무를 자동화할수록 목표를 설정하고 결과를 검증하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인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고 봤다. 이사회 역시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뿐 아니라 구성원들이 판단 경험을 쌓을 기회가 유지되는지, 조직문화와 인적자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제언했다.
◇각국 이사회 경험 공유…다양성은 '의도된 불편함'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WCD Korea), 창립 10주년 기념 ‘WCD APAC Global Forum’에서 패널토론. 왼쪽부터 성효용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김주연 SK이노베이션·포스코홀딩스 독립이사, 히로코 코이데(Hiroko Koide) WCD 일본 대표, 부츠 가르시아(Boots Garcia) WCD 필리핀 대표, 온친수렌 덴데브삼부(Onchinsuren Dendevsambuu) WCD 몽골 대표, 민세진 동국대학교 교수. 사진 제공 = WCD 코리아.
패널 토론에서는 여성 이사들의 활동 경험과 각국의 이사회 운영 사례가 소개됐다. 성효용 성신여대 교수의 사회로 민세진 동국대 교수, 김주연 SK이노베이션·포스코홀딩스 독립이사, 히로코 코이데 WCD 일본 대표, 부츠 가르시아 WCD 필리핀 대표, 온친수렌 덴데브삼부 WCD 몽골 대표 등이 참여했다.
민세진 동국대 교수는 다양성을 '의도된 불편함'으로 표현했다. 기존 구성원과 다른 배경을 가진 이사가 참여하면 이사회에 외부의 시각과 상식을 반영할 기회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민 교수는 "여성 이사가 한 명 있는 것과 두 명 이상 있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여성 이사가 한 명뿐인 이사회에서는 그 한 명이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 명이라도 이사회에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이후 여성 이사의 진출 확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이를 여성 이사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배경의 독립이사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기업 리더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SK이노베이션·포스코홀딩스 독립이사는 이사회가 단기 현안을 넘어 기업의 장기 전략을 논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이사는 자신이 참여한 이사회에서 경영진과 함께 산업과 정책, 지정학적 환경의 변화를 살펴보고 기술 개발과 신사업 방향을 논의한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1년에 한 번 정도 별도의 장기 전략 세션을 마련해 독립이사와 경영진이 중장기 과제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히로코 코이데 WCD 일본 대표는 자신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 지배구조 개선 담당 비상근 이사와 함께 관련 작업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사회 구성원들이 회의실 밖에서 별도의 토론을 진행하는 등 형식적인 제도 준수를 넘어 실제 운영 방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온친수렌 덴데브삼부 WCD 몽골 대표는 여성 이사 후보의 추천과 선임이 주로 사적 인맥을 통해 이뤄져 왔다고 설명했다. 일부 주요 기업이 보다 공식적인 후보 추천·선임 절차를 갖추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한다며 역량 있는 여성들의 이사회 진출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부츠 가르시아 WCD 필리핀 대표는 이사회가 차세대 여성 리더 육성과 승계계획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지금 누가 이사회에 앉아 있는지만이 아니라 내일 누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준비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