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보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현행법 요건에 맞춰 이사회를 구축해 놓은 기업들은 많지만 이사회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풀무원은 이사회를 잘 운영하기로 소문난 기업 중 한 곳이다. 지분 절반 이상을 가진 대주주가 있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고 사외이사 위주의 이사회를 구축한 뒤 이사회에 실질적인 최종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했다.
풀무원 이사회 활동에 누구보다 만족하는 이들은 이사회 멤버들이다. 대주주 뜻에 따라 경영진은 사외이사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사외이사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자기 역량을 쏟아부어 견제와 조력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풀무원 본사에서 만난 김영환
풀무원 선임 사외이사(
사진)는 "이사회에서 효능감을 느끼고 그 효능감이 더 나은 이사회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김영환 선임 사외이사는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다. 경북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전산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김 사외이사는 1983년
KT 연구원으로 입사,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솔루션사업단장과 마케팅본부장, 비즈니스부문장, 대외협력총괄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2011년에는
KT네트웍스 사장에 취임해 2014년까지 근무했다. 현재는 민간 출자로 출범한 인공지능연구원 대표로 올해로 6년째 일하고 있다.
풀무원과의 인연은 2020년 시작됐다. 인공지능연구원 수익사업 모델을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풀무원 사외이사로 일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평생을 엔지니어로 살아온 터라
풀무원이라는 기업이 친숙하지만은 않았다. 주변에 알아보니
풀무원만한 거버넌스를 갖춘 기업도 없다는 평가들이 쏟아졌다. 과거
KT 근무 시절 기업이 외풍에 시달려 온 모습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나.
풀무원 이사회는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기업이 아무리 거버넌스를 잘 구축해놓아도 외부에서 낙하산 인사를 떨어뜨리면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처럼 제도 자체보다 실상 어떻게 운영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면서 "제대로 된 거버넌스라면 그간 쌓아온 노하우와 경험을 살려 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김영환 사외이사는 이사회 내 유일한 정보보호·인공지능 분야 전문가로 선임됐다.
그가 사외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풀무원은 다양한 변화를 거듭했다.
풀무원은 2018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 올초 두 번째 전문경영인을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김영환 사외이사는 이사회 전문경영인 선발 과정에 관여했다. 코로나19 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풀무원푸드앤컬처를 키워내 그룹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성장시키는 모습도 지켜봤다. 제품 생산·판매에 주력했던
풀무원은 서비스 기업으로 체질 자체를 바꾸고 있는 중이다.
이 변화를 주도한 건 이사회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이사회와 각종 소위원회에 참여하며 상당한 효능감을 느꼈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이사회에서 나온 의견들을 경영진이 실제 현장에 잘 반영하고 팔로우업하니 이사 입장에서는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서 "이사회는 오전 7시 반 정도 개최해 2시간 정도 논의하는데 그 열기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주식 5000만원어치를 직접 매입해 스스로 책임감을 더했다.
풀무원이 지금의 이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데는 창업주 남승우 고문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남 고문은 2018년 전문경영인에게 대표직을 넘기고 이사회 의장으로 이동했으며 올초 새로운 전문경영인이 선임되자 전임 전문경영인에게 그 의장직마저 내줬다. 소유와 경영을 완전히 분리해 현재 이사회에만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풀무원은 현행법 요건 이상으로 이사회를 선제적으로 체계화해 시장 호평을 이끌어낸 바 있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기업 지분 절반 이상을 가진 창업주가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실질적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라면서 "창업주가 끊임없이 공부하며 철학적 기반을 꾸준히 다져 온 것이 지금의 거버넌스가 자리잡을 수 있게 된 비결"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다른 기업들 역시 뚜렷한 의지만 있다면 이사회 수준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사회에 꾸준히 주문하고 있는 건 젊어지자는 것. 회사 내적으로는 기업 구성원 개개인이 주도권을 잡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외적으로는 젊은 고객층을 타깃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자는 제안이다. 이사회 멤버 11명 중 3명이 여성인데 이사회 활성화를 위해 성별 다양성을 더 높일 수도 있다. 이사회 내부적으로는 주가 목표치도 설정하고 있다. 주가는 연초 대비 60% 가까이 올랐지만 아직 기대치엔 못 미쳤다.
그는 올초 선임 사외이사로 선임돼 법조인과 정치인, 학계, 산업계 인사 등으로 어우러진 사외이사진과 경영진 간 다리 역할에 주력하고 있기도 하다.
풀무원은 2018년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해 사외이사들로 하여금 선임 사외이사를 선출케 하고 있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사외이사진 모두가
풀무원 이사회 구성원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에 적극적인 점도 특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풀무원 이사회에 시간을 더 투입하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이사회에 올라오는 안건은 사전에 이사회 멤버들에게 공지가 되는데 이사회 멤버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만큼 현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트이기 마련이다. 김영환 사외이사는 ""지속가능한 글로벌 식품 제조 및 서비스 기업으로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만큼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해 제대로 된 AX를 이뤄내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