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의 삼성 지배구조 공격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이사회 변화 요구가 본격화한 지 수년이 흘렀다. 그 사이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들의 국내 기업 대상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만큼 행동주의 펀드의 이사회 개조 시도가 어떤 효과를 내는 지에 대한 데이터도 축적됐다. 케이스 분석을 통해 행동주의 펀드가 이사회의 변화를 요구할 때 결과가 단기 주가 상승이나 주주환원 이벤트로 끝났는지, 아니면 이사회의 선진화와 견제 기능 강화로 이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 파트너십을 내세웠던 행동주의 펀드들이 곧 철수했는지, 아니면 장기적인 관계로 기업의 체질적 변화를 이뤘는지 추적한다.
한국 자본 시장은 이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을 '외국계 자본의 공격'으로 단순히 받아들이는 단계를 졸업했다. 초기에는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을 요구한 뒤 주가가 오르면 빠져나가는 방식이 반복된 것도 맞다. 때문에 줄곧 단기 차익 세력이라는 눈총을 받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행동주의의 전술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자본정책 요구와 더불어 이사회의 규모와 관련 정관을 개편하고 아예 진입을 노리는 사례도 빈번하다. 외국계뿐 아니라 국내 행동주의 펀드도 수많은 케이스를 만들어내며 시장 내 존재감을 키웠다.
배경에는 제도의 변화가 있다. 2020년 12월 도입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3%룰이 행동주의 펀드의 전략을 바꾼다. 감사위원 통로가 열리며 이사회 진입도 노려볼 만한 카드가 됐다. 실제로 진입에 성공한 행동주의 펀드들도 여럿이다. 다만 여전히 소수 의견으로 이사회 내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점과 주가 관리엔 부족하다는 한계점도 있다.
2025년 상법 개정으로 더 강력해진 3%룰이 기다리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전략 및 자본 시장에 미칠 영향도 더 커질 전망이다. 행동주의 펀드가 가져올 보드 리빌딩 시대가 열리고 있다.
◇행동주의 목표 주주환원에서 보드 리빌딩으로 바꾼 3%룰
3%룰은 행동주의 전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전까지 행동주의 펀드의 핵심 요구는 주주환원 정책의 강화였다. 지분을 매입한뒤 오너 및 주요 경영진과 담판을 통해 배당 성향이나 자사주 매입, 비핵심자산 매각 등 자본 정책의 변화를 요구했다. 다만 의사결정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정책을 바꾼 것으로 경영진의 의지나 경영 상황 변화에 따라 다시 되돌아갈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픽=제미나이로 생성한 이미지.
3%룰이 도입된 건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다만 이사를 먼저 선출하고 그 뒤에 감사위원을 선임하는 특례 조항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2020년 말 상법 개정으로 분리선출하는 감사위원 1인이 의무화됐고 감사위원에게는 합산 3%룰이 적용됐다. 3%룰이 실질적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감사위원은 이사회 멤버로서 의사결정의 꼭지점에 있는 자리다. 또 경영진을 견제하는 기능이 특히 강조돼 있다. 이런 감사위원 선임을 대주주의 단독 의사로만 결정하지 못하게 되면서 기업은 긴장했고 행동주의 펀드는 기회를 봤다. 감사위원 추천으로 이사회 진입을 노리게 됐다.
이후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사항은 보다 정교해졌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 주주추천과 함께 기타비상무이사를 통한 전략적 진입, 위원회 신설과 실권 부여, 이사회 의장 분리, 사외이사의 정보 접근권 강화까지 안건으로 제시했다. 주주환원 요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의사결정 구조 자체에 수정을 요구한 셈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 남양유업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3%룰이 적용된 주총에서 소액주주 측이 추천한 감사가 선임됐다. 제도를 통해 외부인이 이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행동주의 펀드의 감사위원 진입은 당연히 견제의 힘을 키운다. 하지만 시간과 구조의 한계를 고려할 때 이사회 진입 자체로 명확한 변화를 이룰지는 미지수다. 사외이사는 임기가 있고, 회사 측이 선임한 이사회 멤버 대비 수적 열세일 수밖에 없다. 결국 임기가 마무리되면 예전의 보드 체제로 돌아가거나 또 한번 어려운 싸움을 해야한다.
사조오양의 사례를 돌아볼만 하다. 감사위원으로 이사회 입성에 성공했으나 의견 개진에는 한계에 부딪혔다. 2022년 차파트너스자산운용과 소액주주들의 추천으로 감사위원 선임에 성공한다. 3%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으니 당시에는 보드 리빌딩의 성공 사례로 평가됐다.
중요한 건 그 이후다. 감사위원 선임 이후 사조오양의 이사회 운영 방식이나 내부통제 구조에서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내부거래와 특수관계인 관련 안은 개선됐지만 주주환원 확대나 푸디스트 인수 등 핵심적인 안건에서는 반대 의견이 힘을 얻지 못했다. 주주 추천으로 선임된 이상훈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더벨과의 인터뷰에서 다대1 체제에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3년이 지난 현재 이 교수는 재선임되지 않았다. 3월 주주총회 전 사조오양의 사외이사 중에서는 임기 만료를 앞둔 황재홍, 방영민, 이상훈 이사 가운데 방 사외이사만 재선임 의결 대상에 올랐다. 황 전 이사는 최대 임기인 6년을 채운 상태였고 이 교수는 재선임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격 실패 후 더 강력한 방패 만드는 기업들
이 교수가 재선임 대상이 되었거나 주주제안이 다시 이뤄졌더라도 이제 주주측 추천인사가 이사회 멤버로 입성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사조그룹 계열사 6곳이 사조오양의 지분 3% 안팎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의결권을 쪼개 확보하면서 3%룰을 피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 후 기업이 변화보다는 방어도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인 셈이다.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명분을 챙기고 구조는 바꾸지 않는 방식도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면 이런 옵션이 가장 경제적이다. 예컨대 금호석유화학은 차파트너스의 안건을 다루는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했다.
시장이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주주총회에서도 금호석유화학이 완승을 거둔다. 차파트너스는 정관 변경을 통한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선임을 요구했다. 이사회 권한과 정관 구조는 그대로 유지됐고 핵심 요구 사항은 무력화됐다.
행동주의가 구조 개편을 요구하면 회사가 환원책으로 명분을 선점한다. 이후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가 과도한 압박으로 비칠 가능성이 커진다. 구조개편이나 선진화, 장기적 밸류업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엑시트 후 주가 '도돌이표' 이벤트로 끝난 상승세
행동주의 펀드들은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내세운다. 단기 차익을 얻고 떠나기보다 기업과 발맞춰 실질적 밸류업을 이루자는 제안이다. 이 제안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려면 펀드가 떠난 후에도 기업은 그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 체질적 변화에 따른 밸류업이 지향점이라서다.
여전히 행동주의 펀드의 엑시트 후 주가가 하락하는 수순은 반복되고 있다. DB하이텍 소액주주 연대는 지난해 말 'KCGI가 고의로 DB하이텍의 경영권을 위협해 단기 차익을 얻고 주주들에게 손실을 줬다'는 취지로 회사를 검찰에 고소했다.
KCGI는 2023년 3월 DB하이텍 지분 약 7.05%를 매입하며 경영 참여를 선언했다. DB하이텍이 팹리스 부문을 물적분할하고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이 단순한 사업재편이 아니라 지주사 전환을 피하기 위한 목적, 지배구조 이슈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약 9개월 만인 12월 말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졌다며 5.63% 지분을 DB하이텍의 모회사인 DB Inc에 시간외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판다. 주가는 급락했다.
한진칼 주가도 분쟁 프리미엄으로 상승했다가 KCGI가 떠난 후 점진적으로 하락한 바 있다. 2022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KCGI측의 안건이 부결되면서 유의미한 경영권 분쟁은 종결됐고 KCGI는 4년 만에 보유지분을 호반건설에 매각했다. KCGI는 두배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한진칼의 주가는 다시 상승세다. 배경은 선진화나 밸류업보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 때문이라고 시장은 평가한다. 또 다시 분쟁 프리미엄에 기댄 오름세라는 이야기다.
비슷한 사례는 아니지만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주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보여주는 예시도 있다. 삼성물산은 2024년 3월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들이 제안한 자기주식 취득 안건이 부결되자 주가가 전 거래일 대비 9.78%까지 급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