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권 CEO의 이사회 진출은 활발하다. 기업 C레벨 출신 인사들은 전·현직 교수 출신에 이어 대형 상장사가 선호하는 사외이사 풀로 꼽힌다. 이 가운데 금융업권 출신 비중이 절반에 육박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활동 확대 등으로 기업들이 자본 효율성 제고에 주력하는 환경 변화가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조업권 출신 사외이사의 경우 남성은 국내 기업, 여성은 글로벌 기업 출신으로 갈리는 경향도 관측됐다.
TheBoard가 지난 9월 말 현재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0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457명(겸직 동일인 사외이사 포함)을 분석한 결과, 이 중 105명(23.0%)이 기업인 출신으로 나타났다. 대형 상장사 사외이사 5명 중 1명은 기업에서 근무한 이력을 보유한 셈이다. 기업 근무 이력에는 민간기업뿐 아니라 공기업 재직 경험도 포함했다. 교수나 관료 등 복수의 직업 이력을 가진 경우에는 가장 최근의 경력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눈에 띄는 점은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의 상당수가 금융업권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105명 가운데 47명(44.8%)이 금융업 커리어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몸담았던 금융업권은 은행과 증권, 보험, 자산운용사 등으로 폭넓었다. 은행권은 은행장 등 C레벨 임원급이 다수를 차지했고, 증권업계는 외국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자산운용사의 경우 국내외 기업 출신 인사들이 고르게 포진한 점이 특징으로 꼽혔다.
금융업권 출신 인사들이 사외이사로 대거 영입되는 배경에는 자본 활용과 주주 설득 능력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높아진 점이 자리하고 있다. 국내 한 금융지주 사외이사는 "국내외 인플레이션 환경 속에서 기업이 보유한 잉여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주주 가치가 크게 달라진다"며 "자본으로 투자를 하든 환원을 하든 이사회 차원에서 주주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이 흐름은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환원 요구가 본격화한 환경과도 맞닿아 있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2023년
JB금융지주에 공개 주주서한을 보내 보통주 자본비율(CET1) 구간별 목표 주주환원율을 제시했다. 주당배당금은 유지하되 추가 환원 재원은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안했다. 상법 개정으로 주주 권리가 강화된 이후 자본 효율성 정책은 이사회 내 주요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다.
금융업권 출신 사외이사는 대부분 대표 등의 C레벨 경력을 갖고 있다.
고려아연의 권광석 사외이사와
셀트리온의 이순우 사외이사의 경우 모두
우리은행장으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한진칼의 박성호 사외이사는
하나은행장,
KT&G의 김명철 사외이사는 아메리카
신한은행장으로 활동했다.
DB손해보험의 윤용로 사외이사의 경우 금융감독원 전신 금융감독위원회를 거쳐 기업은행장과 외환은행장 등을 역임했다.
증권업계 출신 인사들도 다수 이사회에 합류했다.
미래에셋증권 대표를 지낸 최현만 전 대표와 변재상 전 대표는 각각
현대모비스(
한미사이언스 겸직)와
네이버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JP모건 한국 회장을 역임한 박태진 사외이사는
아모레퍼시픽 이사회에 합류했으며 씨티은행장 출신인 박진회 전 행장은
삼성화재와
SK이노베이션 등 시가총액 상위 100위 내 두 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해 눈길을 끌었다.
자산운용업계 경력을 보유한 인사도 적지 않다.
코웨이 김태홍 사외이사와
하이브 박영호 사외이사,
한미약품 윤영각 사외이사, 신한지주 최영권 사외이사,
에코프로비엠 이기환 사외이사 등은 자산운용사 대표로 재직했거나 재직하고 있다.
고려아연 이상훈 사외이사와
기아 이인경 사외이사는 PEF 근무 경험이 있다.
삼성물산 제니스 리 사외이사와
카카오뱅크 유호석 사외이사 등 금융업권 CFO 출신도 이름을 올렸다.
제조업권 출신 인사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 가운데 제조업 경력을 보유한 인사는 20명(19.0%)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삼성과 SK,
LG, 현대차 등 국내 주요 그룹 계열사에서 C레벨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삼성전자 전무 출신인
코웨이 김규호 사외이사,
SK하이닉스 대표 출신
포스코홀딩스의 박성욱 사외이사, 현대차 사장 출신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한성권 사외이사 등이 대표적이다.
제조업권 출신 여성 사외이사의 경우 해외 기업 경력을 보유한 사례가 다수 관측됐다.
SK이노베이션 김주연·이복희 사외이사와
아모레퍼시픽 이재연 사외이사,
크래프톤 이수경 사외이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22년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에 여성 사외이사 선임이 의무화되면서 여성 임원 풀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글로벌 기업 출신 인사들이 유력 사외이사 후보로 부상한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IT 업계 출신들도 이사회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끈 제임스 김, 이지은 등 전직 두 대표가 각각
현대모비스와
SK이노베이션 이사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크래프톤의 경우 애플코리아 대표로 일한 윤구 사외이사를 비롯해 정보라 전 빌댓컴 최고경험책임자(CXO)를 영입하고 있다. 한국금융지주는 넷플릭스에서 일하고 있는 백영재 디렉터를 기용하고 있다.
공기업 재직 이력을 가진 사외이사의 경우 관료 경험을 함께 보유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부 부처에서 경력을 쌓은 뒤 산하 공공기관장으로 이동해 퇴직한 후 기업 사외이사로 기용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사회에서 경영 전문성을 인정받는 점을 감안해 기업인으로 분류했다. 오랜 관직 생활 이후 금융감독원장을 역임한 뒤 한국정책금융공사장으로 일한 진웅섭
카카오뱅크 사외이사가 주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