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물류·운송기업의 CEO이자 세계 여러 기업에서 사내·사외이사·비상임이사를 두루 거친 이사회 전문가. 노르웨이 국적의 얀예빈왕(Jan Eyvin Wang·사진) 기타비상무이사는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 15년째 몸담고 있는 인물이다. 그에게 현대글로비스는 단순한 투자처가 아닌, 긴 시간 함께 성장해온 파트너이자 자신의 경영 철학을 투영해온 거버넌스 무대였다.
현대글로비스 측은 왕 이사를 합리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력을 보유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현대글로비스가 속한 산업에 매우 정통한 만큼 현대글로비스 경영진들이 놓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는 가치있는 조언들을 쏟아낸다고 귀띔했다. 그가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왕 이사는 소수주주의 목소리가 배제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이사로서의 책무라고 강조한다. 더불어 이사회는 단순히 회사의 안건을 다루는 것을 넘어, 불확실성 시대를 헤쳐나갈 ‘전략적 테이블’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외국인 이사가 본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의 현 지점은 어디일까. theBoard는 왕 이사를 만나 지난 15년 동안 현대글로비스의 변화의 물결을 되돌아봤다.
◇15년간 글로비스 이사회 멤버로 자리한 얀예빈왕 이사
theBoard는 지난 19일 화상 미팅을 통해 노르웨이에 있는 왕 이사를 만났다. 왕 이사는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도 보통 화상으로 참여하며 상반기와 하반기, 일 년에 두 번은 꼭 한국으로 건너와 직접 회의에 참석한다고 한다.
theBoard는 19일 화상 미팅을 통해 노르웨이에 있는 얀예빈왕(Jan Eyvin Wang) 이사를 만났다.
왕 이사는 글로벌 물류와 운송 분야 전문가로 불린다. 노르웨이가 북유럽 최대 산유국인 만큼 오일·가스 등 에너지 분야에서도 커리어를 쌓았다. 미국에서 16년, 한국에서 5년 간 근무하는 등 활동 지역도 전 세계를 아우른다.
그는 영국 명문대인 헤리엇와트 대학교(Heriot-Watt University)에서 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교 졸업 직후인 1981년 윌헬름센(Wilh. Wilhelmsen)에 재무분석가로 입사하면서 인연을 시작했다. 노르웨이 해운그룹인 이 회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동차·트럭·고중량장비 해상운송·물류업체다.
왕 이사는 2010년 윌헬름센의 최고경영자에 올랐다. 2017년부터 작년까지는 지주사격인 ‘Wilh. Wilhelmsen Holding ASA’에서 산업 투자 부문 수석 부사장을 역임했다. 최근 수년간은 이사회의 이사 경력이 화려하다. 현대글로비스 뿐 아니라 아스트로캐스트(Astrocast), 에다 윈드(Edda Wind), 크레요나노(Crayonano) 등의 이사로 활약해왔다.
2010년 왕 이사가 현대글로비스 비상임이사로 온 건 윌헬름센의 현대글로비스 지분투자가 바탕이 됐다. 현대글로비스는 윌헬름센과 2004년 물류기법 등을 전수받기 위한 전략적 제휴를 맺고 총수 지분 25%를 윌헬름센에 넘겼다. 이후 윌헬름센이 몇 차례에 걸쳐 지분 매각을 해 현재 11%의 지분이 남아있지만 여전히 굳건한 현대글로비스 2대 주주다.
◇"정의선 젊고 모던한 리더십, 이사회에 고스란히 반영"
왕 이사가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 합류한 지도 어느덧 15년이 지났다. 그는 현대차그룹과 현대글로비스가 겪어온 굵직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2020년 ‘정의선 회장 체제’ 이후의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 대해 묻자 왕 이사는 실제 변화를 체감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의 젊고 모던한 리더십이 고스란히 이사회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 회장은 전세계 고객들을 대상으로 차를 파는 사람으로서 한국 출신이라는 데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글로벌 수준에 입각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비즈니스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고 이건 거버넌스에서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수년 이사회는 확연히 독립성이 강화했다”며 “이사회 역할은 ‘도전(challenge)’과 ‘지지(support)’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사진들은 경영진과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옳은 방향에 대해서는 지지하기도 하면서 이를 구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왕 이사는 이어 현대글로비스의 이사회 구성도 다양성이 훨씬 확보됐다고 평했다. 그는 “과거엔 변호사나 국세청, 대검찰청 등 관료 출신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이사회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걷기도 전에 뛸 생각 하지 마라'는 격언이 있듯이 지배구조는 여러가지를 고려하며 천천히 진화한다"며 "현대글로비스의 경우 대부분 비즈니스가 한국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만큼 훗날엔 외국인 중에 이사회 의장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 이사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보장된 만큼 의견 충돌이 있었던 안건도 있었을 법 했다. 왕 이사는 열띤 토론이 열렸던 ‘배당정책’ 의제를 떠올렸다.
그는 “현대글로비스 이사회에선 배당을 좀 더 늘릴 여력이 있지 않냐는 얘기가 오간 적이 있고 현재는 여러 과정을 거쳐 주주가치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배당정책이 자리를 잡았다”며 “배당정책은 CAPEX, 예상 현금흐름, 글로벌 불확실성, 회사 성장성 등 수많은 복잡한 요소들이 고려돼 정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 이사는 “현대글로비스는 과거엔 운송할 선박을 빌려오곤 했는데 최근엔 직접 확보하는 게 많다보니 자본을 두둑히 둬야 한다”며 “최근 일련의 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 관세, 중동 불확실성 등까지 고려하면 현금 비축을 우선시한 현대글로비스의 배당정책이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불확실성 시대 속 정확한 판 읽는 이사회돼야”
왕 이사는 현대차그룹의 지분순환구조에 대해서는 민감한 이슈인 만큼 섣부른 판단은 유보하면서도 주주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적 시각을 드러냈다. 2018년 지배구조 개편 추진 당시에도 이사회 회의에서 주주들을 먼저 고려한 의사결정인지를 검토했다고 한다. 왕 이사는 2016년 윌헬름센 CEO로서 왈레니우스(Wallenius)와의 합병을 주도해 성공으로 이끈 경험이 있다.
그는 “과거 현대차그룹의 리스트럭쳐링 시도는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워낙 큰 안건이었던 만큼 주주 중심의 의사결정인지를 신중히 체크했던 게 생각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건설적인 비판은 의미가 있지만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모든 걸 의심만 하고 보는 시각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왕 이사는 앞으로의 현대글로비스 이사회는 보다 전략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거시 경제나 지정학적 이슈, 세계 정치적 문제들로 가득찬 불확실성 시대에 직면한 만큼 여러 변화에 대비한 사업적 전략들을 잘 준비해둬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는 “이사회는 더욱 기민한 조직이 돼야 하며 중심을 잡고 모든 상황을 잘 알고(top of things) 있어야 한다"며 "이런 맥락에서 특정 결론을 내지 않고 논의를 끊임없이 확장시킬 수 있는 사외이사만의 회의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자신의 역할론도 확실히 했다. 왕 이사는 “노르웨이에서는 이사회 멤버가 되면 단 1주를 가진 주주에게나 대주주에게나 법적으로 동일한 책임을 지게 된다”며 “이런 유럽 문화에 입각해 나는 (2대주주를 대표해 참여하고 있지만) 단 1주를 가진 주주나 현대글로비스나 윌헬름센이나 기타 등등 주주들을 구별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주주 의견만이 일방적으로 반영되는 것을 경계하며 소수주주들의 입장이 잘 반영될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게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