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시행을 앞두고 기존 감사위원을 자진사임시킨 뒤 동일인을 감사위원이 되는 독립이사로 다시 분리선출하는 기업들이 확인되고 있다. 법이 요구하는 형식은 갖추면서 기존 이사회 인적 구성에는 변화를 주지 않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독립이사는 임기가 늘었다.
거버넌스 전문가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대응은 아니나 상법 개정의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는 편법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최대주주의 영향력을 낮추고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법 개정의 본래 목적을 감안하면 법적 요건의 충족과 실질적인 지배구조 개선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만 기업들이 이런 방식을 택하는 배경에는 최근 한층 치열해진 경영권 분쟁과 주주행동주의도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주주권을 강화하는 제도가 도입되자 기업 역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기존 이사회 구성을 지키기 위한 대응책을 찾고 있다는 설명이다.
◇독립성 강화한다는데…임기 남은 감사위원 사임시켜 재선임
9월 10일부터 도입되는 개정 상법은
대상 상장사가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 가운데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출해야 하는 인원을 기존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 지난 7월 23일부터는 감사위원 선임·해임 때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해 3%까지만 행사하도록 규정도 강화됐다.
다수의 기업이 새 독립이사를 분리선출해 추가하는 방식 대신 기존 감사위원을 자진 사임시켜 임기를 중단한 뒤 같은 인물을 분리선출
대상으로 올리는 방법으로 법적 기준을 맞췄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 후부터 지금까지 최근 1년간 관련 공시를 취합한 결과 확인된 곳만 약 70곳에 달한다.
엔씨는 지난 3월 정기주주총회에서 이은화 독립이사를 감사위원이 되는 독립이사로 재선임했다. 이 이사는 2025년 3월 독립이사로 선임돼 임기가 남아 있었지만 분리선출을 위해 다시 주주총회에 후보로 올랐다. 새 임기는 2년이다.
이마트도 비슷하다. 이상호 독립이사는 2025년 3월 2년 임기로 재선임됐지만 1년 뒤 자진사임했다. 같은 날 다시 2년 임기의 감사위원인 독립이사로 선임됐다.
아이파크현대산업개발과
아모레퍼시픽,
한화갤러리아,
LX하우시스, KG모빌리티,
iM금융지주,
코오롱인더스트리,
엘앤에프,
HD현대마린엔진,
넥센타이어,
CJ CGV,
삼양홀딩스, 휴메딕스 등 여러 상장사가 올해 같은 방식으로 기존 감사위원을 다시 분리선출했다.
지배구조 컨설팅을 제공하는 기관의 고위급 관계자는 위법하지는 않지만 편법적 대응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적법성을 따진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안은 아니다"면서도 "제도의 취지를 고려하면 편법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기존 인물을 그대로 다시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법의 취지와 상반되지 않느냐는 지적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답했다.
기업 자문을 담당하는 법조계 고위급 관계자는 이 같은 대응이 나오는 배경으로 최근의 경영권 환경을 꼽았다. 그는 "주주권을 강화하는 제도가 들어오면 기업도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대응 방법을 찾는다"며 "경영권 분쟁이나 외부 주주의 이사회 진입 시도가 있는 기업에서는 이사회 구성 변화 자체가 경영권과 직결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독후보 추천, 무탈한 재선임…"주총 통과했지만 기관 판단은 별개"
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감사위원의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새 법률 요건도 충족할 수 있는 선택이다. 회사가 기존 감사위원을 다시 후보로 올린 사례에서는 후보 간 경쟁도 없었다. 기존 감사위원을 사임시킨 뒤 동일인을 감사위원이 되는 독립이사 단독 후보로 추천하는 방식이었다. 사실상 재선임에 확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 표결에서도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엔씨소프트의 의결권 행사 주식수 기준 찬성률은 99.2%,
이마트는 95.4%,
LX하우시스는 94.3%였다.
한화갤러리아 관련 안건은 행사 의결권의 99.98%가 찬성했다.
올해 3월 정기주총은 7월 이후인 최근과는 조건이 다르다. 당시 독립이사인 감사위원 선임에는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각자의 의결권을 3%씩 제한하는 방식이 적용됐다.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모두 묶어 3%까지만 행사하게 하는 합산 3%룰은 7월 23일부터 시행됐다.
강화된 규정이 시행된 뒤에도 같은 대응은 이어지고 있다.
휴젤은 8월 21일 임시주총에서 기존 이사직을 자진사임한 패트릭 홀트를 감사위원이 되는 독립이사로 다시 분리선출했다. 회사는 관련 안건을 '지배구조의 투명성 제고' 차원으로 설명했다. 새로운 인물을 감사위원으로 영입한 것은 아니지만 선출 방식 변경 자체를 두고 지배구조 정비의 일환으로 평가한 셈이다.
이 같은 재선임 과정은 향후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는 "이런 히스토리가 적시된다면 의결권 자문사나 기관투자자가 향후 이사 선임 안건을 판단할 때 부정적인 요소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의결권 자문사의 경우 이런 대응을 보다 엄격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봤다. 특히 경영권 분쟁이나 행동주의 주주의 이사회 진입 시도와 맞물려 감사위원의 사임과 재선임이 이뤄졌다면 해당 기업의 과거 지배구조 행태까지 함께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그는 "자문사들은 이 기업이 과거에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를 따라가보며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2년 남았는데 다시 3년…독립이사 임기도 '리셋'
동일인을 다시 뽑는 과정에서 독립이사의 임기를 처리하는 방식도 기업마다 달랐다. 선출 형식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에 보장됐던 임기를 중단한 뒤 새로운 임기를 부여했다.
독립이사의 임기는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지위를 보장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회사의 제도 대응 필요에 따라 임기가 중간에 종료되고 다시 설정되는 현상 자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화갤러리아 송지혜 독립이사는 지난해 3월 2년 임기로 선임됐다. 올해 3월 임기가 1년가량 남은 상태에서 자진사임한 뒤 감사위원으로 분리선출되면서 새 임기는 오히려 3년으로 늘었다.
LX하우시스 원종훈 독립이사도 지난해 3월 3년 임기로 선임된 뒤 1년 만에 사임했고 다시 3년 임기를 받았다. 2028년까지였던 임기가 재선임을 거치면서 2029년으로 연장된 셈이다.
반면 아이파크현대산업개발은 김동수 독립이사의 새 임기를 1년으로 정했다. 기존 임기가 2027년까지였던 만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명에너지도 기존 독립이사를 분리선출하면서 잔여 임기만 부여했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는 사임 과정에 대해 "회사 측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현대엘리베이터 사례를 함께 언급하며 임기 중 사임 문제는 이전에도 논란이 됐다고 부연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주주가 의결권 제한 아래 분리선출한 감사위원의 임기를 중간에 끊는 경우라면 주주권 측면에서 더 민감하게 볼 여지가 있다고 제언했다.
◇9월 10일까지 갖추라는데…11일·17일 임시주총
상법 시행 시점을 넘겨 분리선출 감사위원을 추가한다고 공시한 기업도 있다. 법무부는 개정법 시행과 관련해 9월 10일부터 준비를 시작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날까지 개정 상법상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놨다.
대웅제약이 법 시행 하루 전날인 9월 9일 임시주총을 잡은 것도 유관한 판단으로 보인다. 반면 알리코제약은 9월 11일, 큐렉소는 9월 17일 임시주총에서 분리선출 감사위원을 추가할 예정이다. 두 회사 모두 공시에 주총 개최 목적을 상법 대응으로 명시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9월 10일 이후 주총을 잡은 기업들이 법 시행 이후 열리는 주총에서 개정 규정에 맞춰 안건을 처리하면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주총 소집공고가 이미 시행 전 이뤄진 만큼 개정법에 대응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기업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는 법으로 사임과 재선임 등의 과정들을 제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며 "결국 기관투자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