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M&A가 흔해진 시대, 기업의 '국적'은 여전히 상징적·실질적 의미를 지닌다. 국내 기업이 해외 기업을 인수하거나 반대로 해외 기업이 국내 기업을 사들였을 때 단순한 소유권 이전 이상의 다층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지배구조와 계열사, 경영환경의 재편과 그 과정에서의 거버넌스 충돌 등이다. 글로벌 M&A를 앞둔 기업들이 미리 대비해야할 어젠다이기도 하다. THECFO는 국적 변화가 지배구조와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조망해본다.
두산밥캣은 가족회사에서 출발해 지금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캐시카우 됐다. 두산그룹의 품에 안기기까지 글로벌 기업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규모가 커지고 국적이 바뀌면서, 또 코스피 시장에 입성한 상장사가 되면서 의사결정과 견제기능을 담당하는 이사회도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두산밥캣의 이사회는 어떻게 성장해 왔을까. 가족회의로 사업의 방향이 결정됐던 초기부터 글로벌 대기업 사업부 종속기를 거쳐 사외이사 과반 체제를 갖춘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업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이사회 체계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 속에서 거버넌스가 진화하며 투명성과 글로벌 전략 전문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됐다.
◇가문에서 글로벌 기업 사업부로…모기업 이사회 '종속'
두산밥캣의 뿌리는 1947년 노스다코타에서 설립된 멜로이 제조회사(Melroe Manufacturing Company)다. 농장용 기계를 만들던 켈러 형제가 멜로이 형제와 협업을 시작하며 설립한 작은 가족회사가 모태다. 아들들이 참여하면서 가업이 됐다. 제품 개발과 투자, 판매 등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논의가 곧 가족회의였다. 초창기의 이사회이자 경영진으로 당연히 외부 견제장치나 사외이사 등의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Clark Equipment가 Melroe로부터 회사를 인수하고 찍은 기념사진. 사진=두산밥캣
1969년 클락 이큅먼트(Clark Equipment)가 멜로이 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기업'의 이사회 체계에 진입하게 된다. 다만 밥캣은 자회사이자 사업의 한 부분이었던 만큼 별도의 이사회로 인정할 만한 조직은 없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클락 이큅먼트 본사는 역시 업력이 오래된 일리노이 스틸 회사에서 출발한 곳이다. 규모와 상장 유무를 종합해볼 때 독립적 이사회 체계를 갖췄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 이사회는 클락 이큅먼트의 조직이지 밥캣의 조직은 아니다. 밥캣의 실질적인 전략과 투자 결정 등을 클락 본사 이사회가 주도했다는 의미다. 1995년 클락이 잉거솔랜드(Ingersoll-Rand)에 매각 됐을 때도 상황이 비슷했다.
잉거솔랜드 산하에서 밥캣은 별도의 실무 경영진이 주도해 운영했다. 하지만 당시 외신 등을 참고하면 잉거솔랜드가 밥캣의 CEO 등 경영진을 '임명'했다. 북미와 유럽, 아시아 등을 관장하는 지역별 사업 책임자는 있되 주요 결정은 역시 본사에 따랐다. 또 잉거솔랜드는 밥캣의 소형장비 사업 외에도 다루는 분야가 많았기 때문에 밥캣만을 위한 독립적인 전략을 세우기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두산 인수 후…'통제에서 독립으로 가는 길'
2007년 두산그룹은 잉거솔랜드 산하에 있던 밥캣과 관련 사업부 세 곳을 49억달러에 인수하는 '빅딜'을 단행다. 이와 함께 밥캣은 처음으로 한국형 지배구조와 이사회 체계 아래에 놓인다. 두산그룹은 밥캣을 경영하기 위해 두산인프라코어의 미국 지주사인 두산인프라코어인터내셔널(DII)을 설립한다. DII에는 DII 파이낸셜 서비스팀, 회계, 재무, 전략 인적자원(HR), IT팀 직원 등이 근무했다.
박용만 (주)두산 전 회장과 김용성 두산인프라코어 전 사장 등 두산의 인물들이 밥캣을 진두지휘했다. 한국 기업에 편입됐지만 초반에는 모기업 산하에서 주요 전략이 결정되는 이전의 모습과 비슷했다. 밥캣의 전략과 주요 의사결정은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 등의 주요 경영진이 짜고 승인하는 구조였다.
특히 인수 초반에는 밥캣의 인수 과정에서의 재무 부담, 밥캣의 사업 재편 등 전략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았다. 모회사 차원의 긴밀한 통제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초반까지 이런 탑다운 구조가 유지됐다.
변곡점은 2014년이다. 밥캣의 북미와 유럽 사업을 관장할 신설회사 '밥캣홀딩스'가 이때 신설됐다. 두산인프라코어가 밥캣홀딩스의 지분을 모두 소유하는 구조이지만 밥캣홀딩스가 중간지주 형태로 설립돼 밥캣만을 관할하는 이사회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중간지주사가 설립되면서 본사의 소재지도 미국에서 경기도 성남으로 바뀐다.
이사회가 정식으로 구성되면서 밥캣의 의사결정 구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북미건설기계담당 최고경영자(CEO)였던 스캇 성철 박 두산밥캣 대표가 2014년부터 현재까지 두산밥캣을 이끌고 있다. 2015년 두산인프라코어밥캣홀딩스는 두산밥캣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본격적인 상장 채비를 한다. 자회사이자 하나의 사업부처럼 관리됐던 밥캣이 독립 법인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IPO' 경영진·사외이사 체제 안착…글로벌 사업 자율성도 보장
2016년 코스피 상장은 밥캣 이사회 구조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상장사 요건에 따라 사외이사 비중을 과반으로 늘렸다. 2016년 사업보고서를 참고하면 출범 당해부터 감사위원회·내부거래위원회·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등 소위원회를 설치했다.
상장 직후 이사회는 사내이사 2명과 사외이사 3명 체제로 출발했다. 현재는 사외이사 4명으로 확대됐다. 2024년 말을 기준으로 회계 재무 전문가인 국경복 사외이사, 최지광 사외이사, 법률 전문가인 남유선 사외이사, 경영 전문가인 이두희 사외이사 등을 선임했다. 사외이사 후보추천도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맡아 독립성을 강화했다.
사업 운영 구조도 달라졌다. 북미 매출 비중이 70% 이상인 상황에서 현지 경영진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한국 본사 중심 거버넌스와 조율하는 이중 구조가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주요 전략은 본사 이사회에서 심의·승인되지만 현장 실행 권한은 현지 경영진이 진두지휘한다. 글로벌 시장 대응 속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북미법인은 비상장사로서 미국의 촘촘한 거버넌스 체계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두산밥캣 본사는 신사업 도전과 외부 기업 인수합병(M&A) 등의 거시적인 전략을 구축한다. 결과적으로 투명성과 현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하이브리드 거버넌스 모델이 정착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