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의 거버넌스는 독특하다. 회사 창립자 고 유일한 박사 서거 직전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유한재단이 최대주주로 자리잡게 됐고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가 이어져왔다.
유일한 박사의 레거시는 이사회에도 깊이 뿌리내렸다. 전문경영인 체제 하에서 이사회의 견제와 균형 역할도 충실히 이뤄진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이사회는 오후 2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난상 토론 끝에 이사들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는 일도 벌어진다.
이사회는 오랜기간 회계 전문가와 법조인, 업계 전문가 등 4인 체제를 유지해 왔다. 현재 회계 전문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는 김준철 사외이사(사진)다. 1965년생으로 서울대를 졸업한 김 사외이사는 다산회계법인 회계사로 재직 중이다. 딜로이트안진 회계법인에서 부대표를 역임,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감사위원회포럼 창립을 주도키도 했다. 현재는 SK디앤디 사외이사(이사회 의장)직도 겸직하고 있다.
그가 유한양행에 합류한 건 2021년이다. 당시 유한양행은 상근 감사제도를 감사위원회 제도로 바꾸고 있던 상황이었다. 수십 년 간 회계사로 활동해 온 김 사외이사는 최적의 후보 중 한 명이었고 이사회 합류 이후 지금까지 줄곧 감사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김 사외이사를 선임한 배경으로 그의 전문성에 주목했다. 김 사외이사는 "이사회 역할은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 범위를 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9시부터 2시까지, 이사회 논쟁 속 의견 갈리기도
김 사외이사가 유한양행과 인연을 맺은 건 딜로이트안진 재직 시절 조욱재 유한양행 대표를 알게 되면서다. 유한양행이 감사위원회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 영입 필요성이 커졌고 김 사외이사에게 영입 제안이 전달됐다. 회계사 출신 김 사외이사에게 감사위원 역할은 익숙했지만 사외이사로 일하는 데는 보다 넓은 시각이 필요했다. 구체적 사업과 투자, 지배구조 전반을 경영진들과 함게 고민해야 했다.
그는 "경영진이 새로운 사업 계획을 제시하면서 자신감과 의지를 보여줬을 때 이사회가 이를 견제 감시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면서 "회계사는 숫자를 중심으로 회사를 보지만 이사회에서는 사업 전체를 분석하고 평가해야 한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계속 질문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유한양행 이사회 논의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다. 통상 오전 9시 열리는 이사회는 오후 2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김 사외이사 스스로도 2023년 3월 이사회에서 투자 안건에 기권 의견을 낸 적도 있었다. 이사회 개최 전 충분한 논의 시간이 주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최종 기권 의사는 사실상 반대 의견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만큼 이사회 내 논의가 활발하다는 뜻이다. 당시 안건은 투자 관련 사안이었다. 김 사외이사는 경영진 설명에도 일리가 있다고 봤지만 보다 넓은 관점에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최근 더벨과 만난 김준철 유한양행 사외이사(감사위원장)은 "실무 검토와 논의가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사회 역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진=이돈섭 기자]
이사회 내 논의가 뜨거웠던 대표적 안건으로는 밸류업 정책이 꼽힌다. 유한양행은 2024년 10월 제약·바이오 업계 최초로 밸류업 계획을 선보였다. 단순히 시장 눈높이에 맞춰 배당성향을 일률적으로 높이기보다 제약업종 특성과 장기성장 전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려했다. 김 사외이사는 "국내외 제약업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 배당 성향을 어떤 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고민했다"고 강조했다.
2024년에는 정관을 개정해 회장·부회장직을 신설했는데 이 결정이 조명을 받기도 했다. 유한양행이 오랜기간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회장 직함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상당했다.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해석도 제기됐지만 김 사외이사는 "외부 전문 인력 영입 과정에서 직급 체계를 유연하게 가져가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해 유한양행은 외부출신 임원 채용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
◇ "이사회, 실무 검토 논의가 빠르게 이뤄지도록 도와야"
김 사외이사는 과거 딜로이트안진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수습한 경험이 있다. 분식회계 사태 이후 외부감사 제도가 대폭 강화되면서 딜로이트안진 역시 타 회계펌과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신규 감사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이 과정에서 딜로이트안진 지배구조는 한국 법인이 글로벌 이사회와 소통하는 구조에서 지역 거버넌스 체계를 거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당시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던 김 사외이사는 글로벌 거버넌스센터와 직접 소통하며 이사회 운영 방식을 재정비했다. 그는 "글로벌 멤버들과 다양한 사례를 논의하면서 느낀 건 지배구조 핵심은 사외이사 숫자를 늘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경영진과 이사회 사이 정보 흐름이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실무 검토와 논의가 자연스럽고 빠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경험은 유한양행 이사회 활동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사외이사들이 단순히 안건 찬반 의견을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영진과 함께 회사 리스크와 방향성을 장시간 논의하는 구조를 유도하고 있다는 의미다. 유한양행은 고 유일한 박사 서거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정 오너가 이사회를 좌지우지하지 않는 만큼 이사 개개인의 역할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사회 과제 중 하나는 자사주 보유·처리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유한양행이 보유한 자사주는 전체 발행주식의 7.5%다. 자사주는 취득과 함께 자본 차감항목으로 계상되기 때문에 소각에 따른 효과가 제한적일 순 있지만 그간 기업들이 자사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온 만큼 단순 소각으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김 사외이사는 "기업 발전 관점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강조했다.
김 사외이사가 생각하는 이사회의 핵심 역할은 '최저 기준'을 설정하는 것. 경영진이 추진하는 사업 방향 자체를 결정하기보다 감당 가능한 리스크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 사외이사는 "이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을 직접 선정하는 등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면서 "이사회가 특정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