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를 도입했느냐가 중요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AI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20년 넘게 플랫폼과 콘텐츠 산업에서 미래전략을 맡아온 류정혜 우리금융지주 사외이사는 더벨과 만나 AI 시대 이사회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AI를 얼마나 많이 활용하느냐보다 이를 통해 어떤 경영 목표를 달성하고 경쟁력을 만들어낼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앞으로 이사회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금융권에서 AI는 올해 경영 화두의 중심에 있다. 4대 금융지주 회장들은 신년사에서 일제히 AI를 핵심 키워드로 꺼내 들었고, 임원 워크숍 주제를 AI로 정하거나 계열사별 AX(AI 전환) 과제를 발굴하는 등 전사적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이사회 구성에도 반영됐다. 우리금융은 올해 3월 류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금융지주 사외이사 가운데 AI 전문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사례다. 류 사외이사는 현재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위원,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 AI 미래포럼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AI를 쓰는 시대에서 AI를 묻는 시대로"
류 사외이사는 "이번에 저와 함께 소비자보호 전문가가 새롭게 선임됐다"며 "AI와 소비자보호 전문가를 동시에 영입한 것만 봐도 이사회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명확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임종룡 회장이 AX를 핵심 전략으로 추진하는 만큼 금융권 내부보다 테크 산업의 시각을 가진 전문가를 찾았던 것으로 이해했다"며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산업뿐 아니라 정책 흐름까지 함께 보고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류정혜 우리금융지주 사외이사
20년 넘게 테크 업계에서 일한 그에게 금융지주 이사회는 말 그대로 '극과 극'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딱딱한 조직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류 사외이사는 "딱딱하다기보다 프로토콜과 문화가 다른 것"이라며 "오히려 너무 신선했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 자극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리스크 관리가 중요한 산업이다 보니 만들어진 의사결정 구조와 문화 자체가 공부가 됐다"고 했다.
AI를 바라보는 관점도 기존 금융권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현재 기업들의 AI 전환 수준을 크게 네 단계로 진단했다. AI를 도입하는 단계, 생산성을 높이는 단계, AI 기반 서비스와 제품을 만드는 단계,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단계다.
류 사외이사는 "많은 기업이 생성형 AI로 업무 시간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중요한 과정이지만 아직 중간 단계"라며 "그 다음에는 조직의 업무를 AI 중심으로 다시 설계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사회 역시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고 봤다. 류 사외이사는 "AI를 도입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이를 통해 회사가 무엇을 이루려 하는지를 계속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많은 기업이 AI 도입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정작 이를 통해 달성하려는 경영 목표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목표를 끊임없이 묻고 점검하는 것이 앞으로 이사회의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의 AI 경쟁력은 보안과 거버넌스에서 나온다"
금융회사의 AI 전략은 플랫폼 기업과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고 류 사외이사는 설명했다. 테크 기업은 새로운 서비스를 빠르게 실험하며 시장을 만들어가지만 금융은 소비자 보호와 보안, 규제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산업이라는 이유에서다.
류 사외이사는 "테크 기업은 일단 시도해보고 시장을 만들어가는 문화가 강하지만 금융은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혁신해야 하는 산업"이라며 "같은 AI를 도입하더라도 접근 방식이 훨씬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권의 AI 경쟁력은 새로운 서비스를 얼마나 빨리 내놓느냐보다 데이터를 AI가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금융은 이미 방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만 AI가 바로 읽고 활용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라며 "우선 AI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데이터를 정비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재설계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는 새로운 서비스를 시도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체감하는 서비스보다 내부 업무 재설계와 데이터 인프라를 정비하는 데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단계"라며 "이 작업이 끝나야 그 위에서 다양한 AI 서비스도 본격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류 사외이사는 금융권의 AI 전략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이 최근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사회 합류 초기에는 AI를 활용해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만드는 데 관심을 뒀다면 최근에는 AI를 악용한 공격까지 대비할 수 있는 보안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는 판단이다. 그는 "지금은 보안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됐다"며 "앞으로 등장할 더 뛰어난 AI를 해커가 악용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도록 보안 체계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지주 이사회에 합류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으로는 거버넌스를 꼽았다. 우리금융지주는 회장을 제외한 전원이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이사회에서 나온 발언은 모두 회의록으로 정리한 뒤 사외이사들이 직접 취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류 사외이사는 "발언 하나하나를 훨씬 신중하게 하게 된다"며 "연륜이 많은 사외이사들의 질문과 코멘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경영 수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테크 업계가 금융회사로부터 배울 점도 적지 않다고 했다. 류 사외이사는 "많은 테크 기업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문제 상당수가 거버넌스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데서 시작됐다고 봤다"며 "전혀 다른 산업에 있던 사람을 폭넓게 검증해 이사회로 영입한 것도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는 거버넌스가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금융은 테크에서 AI와 혁신의 속도를 배우고, 테크는 금융에서 거버넌스와 이사회의 다양성을 배워 서로 균형을 맞춰가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