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노스(Theranos)란 스타트업이 있었다. 치료를 뜻하는 테라피(therapy)와 진단을 뜻하는 다이어그노시스(diagnosis)를 합친 이름이다.
테라노스는 엘리자베스 홈즈가 2003년 만든 리얼타임큐어스에서 시작했다. 홈즈는 진단을 통해 곧바로 치료로 이어지는 서비스를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아 테라노스를 창립했다. 홈즈는 스탠퍼드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중퇴하고 등록금을 모아 창업을 했다.
기술은 획기적이었다. 피 한방울만 뽑으면 240여가지 질병 검사를 할수 있다고 자랑했다. 기업 가치는 한때 90억 달러, 약 12조원에 달했다. 포브스는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젊은 자수성가 여성 억만장자로 엘리자베스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월가 투자자들이 흥분했고 실리콘밸리 최대 기대주로 거론됐다.
테라노스의 기술은 결국 허구로 드러났다. 2015년 스탠퍼드 의학교수 존 이오아니디스가 "테라노스가 피어 리뷰를 거친 논문을 한편도 발표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토론토대 디아만디스 교수는 "테라노스의 주장이 대부분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 존 캐리루 기자가 쓴 기사로 테라노스의 실체가 밝혀졌다. 테라노스가 개발한 혈액검사기 에디슨은 지멘스 등 기존 장비를 사용한 것이었고 결과가 부정확하다는 내부 증언을 기사화했다. 테라노스는 SEC 조사를 거친 끝에 폐업하게 됐고 엘리자베스 홈즈는 사기 기소를 당해 실형을 받았다.
홈즈의 기술은 사실상 사기였다. 있지도 않은 기술에, 다른 회사의 혈액 측정기를 활용한 제품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검증할 내부 견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 테라노스에도 훌륭한 이사회가 있었다. 저명한 인물들이 대거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로 참여하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샘 넌 전 상원 군사위원장, 게리 러프헤드 퇴역 해군 제독, 제임스 매티스 퇴역 해병대 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의사 출신인 빌 프리스트 상원의원도 이름을 올렸다. 의사이긴 하지만 정치로 전업한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이사회 멤버들의 화려한 이력은 회사에 신뢰를 더해줬다. 투자자들은 이사회 명단을 보고 안심했다. 하지만 정작 필요했던 건 신뢰가 아니라 검증이었다. 이사회 안에서 아무도 기술의 실체를 물을 수 없었다. 사기는 걸러 지지 않았다.
이사들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허술한 이름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장성을 지낸 이들이 보드를 채웠다. 각자의 영역에서는 최고였다. 다만 헬스케어 기업의 기술에 의문을 제기하고 검증할 이사들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독립이사를 찾는 기준 중 하나는 이름 값이다. 장관 출신, 법관 출신 인사들이 일 순위로 떠오른다. 규제 당국의 장을 지낸 인물이라면 더욱이 금상첨화다. 규제 담당 현직자들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줄 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들만 모아 놓는다고 제대로 이사회가 돌아갈리 만무하다. 테라노스 사태가 잘 보여준다.
상법 개정안의 시행으로 이사회의 기능과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사외이사에서 독립이사로 이름이 바뀌며 '독립'적으로 역할을 하라는 롤이 부여됐다. 저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뽑은 독립이사들이 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저명한 인물이 아니라 제대로 이름값 하는 독립이사들이 필요해진 시대다. 이사회의 기능과 사명에 대해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받고 소명 의식을 갖춘 독립이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