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데스크 칼럼

비서실의 진화

최명용 SR본부장 겸 부국장

2026-04-08 07:10:01

삼성그룹엔 비서실이 있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은 참모를 모아 1959년 비서실을 만들었다. 인재 제일주의를 주문하던 시기다. 비서실은 재무와 인사를 맡았다. 인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중용할 인물을 찾기 위해 정보를 모았다. 인사 정책을 세우고 사람을 천거했다.

사람에 대한 정보가 모이고 인사권을 쥐고 있으니 권력이 됐다. 1978년 취임한 소병해 비서실장 취임 이후 삼성 비서실은 막강해졌다. 재무, 인사 외에 기획, 경영관리, 국제금융, 홍보까지 그룹 업무를 맡았다. 대관 업무, 로비스트 역할도 포함됐다. 15개팀에 250여명의 인력이 근무했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엔 신경영이나 위기 경영 과정에서 비서실의 규모가 줄어드는 일도 있었다. 구조조정 차원에서 인력을 줄였지만 권한은 여전히 막강했다. 이 회장이 큰 방향을 잡고 비서실이 세부 전략을 세운 뒤 각 계열사가 이를 실행하는 구조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나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모두 비서실이 주도했다. 이 회장 경영 공백기엔 비서실장이 최고 의사결정권자였다. 비서실은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본부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후 전략기획실, 미전실이란 이름으로 그 역할을 계속 이어갔다.

삼성은 2016년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대관 로비 업무를 없앴다. 이후 삼성의 콘트롤타워는 사업지원TF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업무 영역이 쪼개지고 소그룹별로 조율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는 비서실이란 이름도, 그 역할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근 삼성의 콘트롤타워 부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이재용 회장 취임 이후 역대급 실적을 내고 급변하는 글로벌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선 비서실 역할이 필요하다는 게 재계 안팎의 목소리다.

어떤 콘트롤타워를 세워야 할까. 대관이나 로비는 뺀 체 그룹을 총괄하는 본부를 만드는 것이 한 방법이다. 가장 심플하게는 사업지원TF를 합치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볼만한 것은 이사회 사무국이다. 한국에서 이사회 사무국은 허드렛일을 하는 조직에 가깝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선진 기업들의 거버넌스를 보면 이사회 사무국의 역할이 상당하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이사회 사무국은 의무화돼 있다. 업무 조직도를 단순화하면 이사회 산하에 대표이사, 바로 직속으로 이사회 사무국이 있다. 이사회 사무국은 거버넌스팀과 법무팀, 이사회 지원팀을 거느린다. 대부분 임원급이 배치돼 있고 법무총괄과 밀접하게 기능을 한다.

영국은 상장기업들에게 법적으로 이사회 사무국을 반드시 두도록 하고 하고 있다. 모든 이사들이 사무국 기능에 수시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이사 교육, 주주 커뮤니케이션, 임원 보상까지 이사회 사무국이 역할을 한다.

결정은 이사회에서 하지만 결정의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기능이 사무국에 있다. 이사회의 운영이란 기본 기능 외에 거버넌스의 구조를 설계하고 전략 기능까지 수행한다. 이사회가 무엇을 논의할 지 미리 조율하는 기능은 비서실의 기능과 유사하다.

상법 개정 이후 이사회 중심 경영에 대한 중요도가 무엇보다 높아지고 있다. 주주충실의무와 독립성에 대해선 어느 때보다 강도높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삼성이 과거의 비서실을 부활시키는 것은 다시 회장 중심, 오너 중심의 경영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이사회 경영으로 진일보하는 시스템을 추구한다면 이사회 사무국을 강화해보는 것을 추천드린다.

공교롭게 이사회 사무국의 영어식 표현은 코포레이트 세크레터리(Corporate Secretary)다. 오너를 위한 비서실에서 회사를 위한 비서실로 진화하는 것, 깊이 있게 고민해 볼 법한 명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