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 강화를 골자로 한 상법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부가 소수주주의 이사 선출 권한을 실질적으로 확대할 수단을 마련하는 셈이다. 지배주주 중심으로만 기업 의사결정이 이뤄지다보니 소수주주가 배제돼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발생한다고 진단한 데 따른 조치다.
해당 제도가 시행되면 주주 행동주의 펀드가 활동반경을 더욱 넓힐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2020년 12월부터 시행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3%룰 도입이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활성화를 촉발했던 과거를 근거로 한 분석이다. 이를 두고 재계는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외부 세력으로 인해 경영 안정성이 저해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주주권 확대 초점 맞춘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선출 정부가 추진하는 상법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집중투표제 정관 배제 금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및 3%룰 강화 △전자 주주총회 도입 △독립이사 제도 도입 등이다.
이 중 소수주주가 이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하는 핵심 법안은 △집중투표제 정관 배제 금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및 3% 룰 강화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여러 명 선출할 때 주주가 자신이 가진 주식 수에 선출되는 이사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예컨대 주주총회에서 3명의 이사 후보가 나왔다면 10표를 가진 주주가 한 명의 이사 후보에게 총 30표를 몰아줄 수 있다.
기존 제도에서는 주주가 1주당 1표만 행사할 수 있어 지배주주가 이사회 구성에 대한 권한을 독점하기 쉬웠다. 그러나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수주주가 지지하는 이사가 기업의 이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집중투표제를 더 이상 정관으로 배제할 수 없어 의무 도입하게 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는 3%룰과 결합할 때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 기존에 분리선출 방식으로 선출되던 감사위원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확대하는 게 상법개정안의 골자다. 감사위원 선출 시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는 게 3%룰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로 촉발된 주주 행동주의, 지배구조 개선 '집중 요구' △집중투표제 정관 배제 금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및 3% 룰 강화 제도가 시행되면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상헌 iM증권 애널리스트는 “주주 행동주의를 실행하는 사모펀드, 기관투자자, 소액주주 등이 감사위원 선출 과정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상법개정안이 주주 행동주의 활동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한국 주주 행동주의의 역사를 되짚어봤을 때에도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스튜어드십코드 제정 이전까지 국내 자본에 의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는 좀처럼 자리잡지 못했다. 주주 행동주의 펀드 설립은 허용되어 있었지만 주주간 이해상충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정비가 충분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다 2020년 12월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3%룰이 제도화한 것을 계기로 2022년부터 국내 자본에 의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에는 트러스톤자산운용만 주로 활약했지만 이듬해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2022년 활동한 국내 자본에 의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로는 안다자산운용,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라이프자산운용, 트러스톤자산운용, 플래시라이트 캐피탈 파트너스(Flashlight Capital Partners) 등이 있다.
특이점은 국내 자본에 의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요구가 대부분 지배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2021년부터 2023년 2월까지 국내 주주 행동주의 펀드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트러스톤자산운용은
BYC에 이사회 투명성 확대를 요구했고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와 국내 금융지주에 사외이사 관련 안건을 요구했다. 2023년 KCGI는 오스템임플란트에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차파트너스는
남양유업에 감사 선출 등을 요구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은 “국내 자본에 의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는 글로벌 시장 대비 지배구조에 대한 제안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업가치 제고가 이사회 구성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며 “주주 행동주의가 지배구조의 건전성과 경영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개선한다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완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발하는 재계 "경영 자율성 침해, 적대적 M&A 가능성↑" 그러나 재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표하고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는 최근 ‘상법 일부개정법률 의원 발의안에 대한 의견’을 내고 “집중투표제 및 감사위원 분리선출 제도가 최대주주에 대한 역차별로 기업 자율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적대적 M&A(인수합병) 등 특정 목적을 가진 사모펀드나 투기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가 이사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져 경영 리스크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G7 7개국 중 4개국은 집중투표제를 채택하지 않았으며 미국, 일본, 캐나다는 회사 정관으로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부여했다. 미국은 적대적 M&A의 급격한 증가, 일본은 이사회 내부 대립에 따른 원활한 경영활동 저해 등을 이유로 제도 확산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또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3%룰이 강화하면 감사위원회 도입 취지가 흐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감사위원회 제도는 감사 제도의 기능 상실을 보완하기 위해 과거 도입된 제도다. 기업들이 상법개정안으로 부담을 느끼면서 감사위원회 대신 상근 감사를 두며 오히려 지배구조 선진화 흐름에 역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사전적 감시 기능 활성화 등으로 감사위원회가 바람직한 지배구조로 권장돼 왔다”며 “그러나 3%룰이 강화하면 상근 감사 선출, 감사위원 선출 모두 의결권 제한을 받게 되므로 기업이 감사위원회를 유지하는 대신 상근감사 1인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