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의 삼성 지배구조 공격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이사회 변화 요구가 본격화한 지 수년이 흘렀다. 그 사이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들의 국내 기업 대상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만큼 행동주의 펀드의 이사회 개조 시도가 어떤 효과를 내는 지에 대한 데이터도 축적됐다. 케이스 분석을 통해 행동주의 펀드가 이사회의 변화를 요구할 때 결과가 단기 주가 상승이나 주주환원 이벤트로 끝났는지, 아니면 이사회의 선진화와 견제 기능 강화로 이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 파트너십을 내세웠던 행동주의 펀드들이 곧 철수했는지, 아니면 장기적인 관계로 기업의 체질적 변화를 이뤘는지 추적한다.
우리나라 대기업집단의 상당수는 여전히 오너 일가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는 소유지배구조다. 가치판단과 별개로 총수 일가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을 갖고 있더라도 복잡한 순환출자와 계열사 지분 등을 통해 그룹 전체를 장악해왔던 건 사실이다.
때문에 오너기업들은 필요에 의한 우호 지분이나 자본 투자가 아니라면 소액주주나 외부 세력의 경영 간섭을 최소화하고 폐쇄적인 지배구조를 유지하고자 했다.
국내에 행동주의를 각인시킨 엘리엇의 삼성물산 합병 저지 후 오너기업들도 주주행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초기 주주환원에 초점을 맞췄지만 3%룰로 오너기업 이사회에도 통로가 생기며 소수주주 연합과 진입 등 전술이 다양해졌다. 행동주의가 만든 균열은 오너기업 선진화를 이끌거나 혼란의 시작이 됐다.
◇특수관계인·우호지분·자사주와 위임장의 혈투
오너기업의 연혁을 보면 기업의 태동에 큰 서사를 부여한다. 창업주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 일군 기업인지를 소개한다. 특히 국내에서는 기업을 부모·조부모가 낳고 후대가 키워낸 하나의 자손과 같이 대한다. 오너일가의 기업에 대한 애착과 통제욕이 엿보인다. 재화가치 그 이상의 의미다.
*그래픽=제미나이로 생성한 이미지.
그만큼 오너 리더들은 끝까지 경영권을 사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자신들의 재산과 지분을 지키려는 의지도 굳건하다. 때문에 외부의 공격이 들어왔을 때는 타협보다 대치를 선택하곤 한다. 한진칼, SK, 삼성물산, 현대차그룹은 물론 행동주의와 일부 협상한 기업들조차 최후의 경영권은 방어하고자 했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미 갖고 있다. 높은 고정 지분율이다. 개개인 총수의 지분이 낮더라도 특수관계인 지분을 합하면 행동주의 펀드가 넘보기 어려운 수준의 지분을 보유했다. 태광산업은 이호진 전 회장 일가의 지분이 54.53%다. 여기에 재계 친분과 전략적 관계에 따른 우호지분도 활용 가능하다. 한진칼은 조원태 회장 가족과 백기사의 합산 지분이 30%대를 넘었다.
자사주도 무기가 된다. 의결권이 없다는 이유로 소각하지 않았던 자사주를 백기사에 매각하는 등의 방법으로 우호지분으로 되살려왔다. 예컨대 삼성물산이 엘리엇과의 표 대결 직전 자사주 5.76%를 KCC에 매각한 건을 두고 법원은 경영권 방어 차원의 정당한 판단으로 인정했다.
행동주의 펀드는 상대적으로 적은 지분을 들고 승리하기 위해 위임장을 확보한다. 소액주주 캠페인을 통해 의결권을 모으고 자문사에서 유리한 권고 의견을 내리면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기세등등했던 엘리엇은 다른 주주 설득에 실패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혹은 가족끼리의 분쟁에서 한쪽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오너 리더십과 행동주의 펀드의 장점을 모두 취하기도 한다. 콜마홀딩스와 달튼인베스트먼트, 한진칼과 KCGI 격돌에도 이같은 양상이 읽힌다.
◇초국적 펀드가 남긴 충격, 소버린과 엘리엇의 공격
국내 행동주의가 개화하기 전 글로벌 펀드의 국내 오너기업 공격은 재계에 충격을 안긴다. 정당성을 떠나 외국계 자본의 국내 기업 침략과 같은 초기 이미지는 이들이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에는 행동주의의 부정적 효과에 초점이 맞춰진다. 경영 불안정성 초래와 리소스의 분산, 기업의 대응 비용 발생 등이다. SK와 삼성, 현대차 등 대주주가 절대 지분을 갖기 어려운 대기업집단을 공격해 오너일가의 장점은 무력화했다.
소버린은 압도적인 지분으로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위협한다. 2003년 4월 SK의 지분 14.99%를 취득했다고 공시한다. 당시 최태원 회장의 직접지분은 1.4%에 불과했다. 1대 주주로 올라선 소버린은 분식회계 사건을 이유로 정관 변경과 이사회 진입을 추진한다.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으면 이사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으로 최 회장의 해임을 목표한 셈이다.
국내 은행 등의 기관투자자가 집결한 끝에 SK 경영진이 승리한다. 이때는 시장논리보다 'SK그룹의 해체를 막자'는 국익 여론이 영향을 미쳤다. 소버린은 2005년 7월 보유지분 전량을 처분하는데 투자금의 4배를 차익으로 얻는다. 단기 차익 후 엑시트라는 평가는 덤이었다.
삼성물산과 엘리엇 사례 때도 행동주의 자체보다는 한국 기업 약탈이라는 프레임이 더 주목을 받았다.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이 11%, 이건희 선대회장 등 총수 일가의 의결권도 막강하지 못했다. 엘리엇은 발빠르게 주식 7.12%를 인수해 2대주주가 된다. 하지만 국민연금을 설득하지 못해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2021년 태광산업의 지분 약 5%를 취득하고 2022년말 저평가 등을 이유로 경영참여를 선언한다. 대규모 유보금을 활용해 투자와 배당을 확대하고 자사주를 소각하라는 요구는 초기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광산업의 흥국생명 4000억원 출자도 갈등을 불렀다.
전환점은 2024년 주주총회였다. 트러스톤이 추천한 사내이사 1인과 사외이사 2인의 선임을 수용한다. 이사회 절반이 트러스톤 측 인사로 채워지면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트러스톤 측 이사들이 태광산업이 추진한 자사주 기반의 교환사채(EB) 발행에 반대표를 행사하며 다시 긴장감이 고조된다. 결국 태광산업이 EB 발행 계획을 철회하고 트러스톤은 준비하던 법적 대응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사회 내부에서는 총수측 이사와 행동주의측 이사 간 이견 표출이 본격화된다. 2023년말 선임된 성회용 대표가 사임한 후 트러스톤은 경영진이 결정권 없이 총수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트러스톤은 꾸준히 파트너십형 행동주의를 표방한 하우스다. 실제로 경영진과 물밑 협상은 물론 주주서한과 이사회 진입 등 여러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이사회 의석을 얻고 들어가 내부에서 변화를 꾀한다. 사외이사 독립성이 제고되고 주주가치 훼손 시도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총수 일가의 지배력 속 갈등은 꾸준히 재발하고 있다. 이사진의 분열로 경영진 교체가 반복되고 의사결정 혼선이 빚어졌다.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이 남게 됐다. 또 트러스톤의 태광산업 지분 매각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그 사이 주가가 꾸준히 우상향하는 흐름도 보이지 않는다. 목표했던 밸류업 효과가 아직까지는 가시화되지 않았다.
오너일가의 싸움에 행동주의 펀드가 참전하면 경우의 수가 복잡해진다. 행동주의가 보유한 지분에 오너일가의 지분이 더해져 승리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쪽이 우세하지 않은 싸움이 된다. 한진칼과 KCGI, 일명 강성부 펀드 사례가 그랬다. KCGI는 2018년 한진칼의 지분 9%를 취득하며 등장한다.
당시 여러 오너 리스크가 발생하면서 KCGI가 경영참여를 선언한다. 2019년 조양호 선대회장이 급작스럽게 별세하면서 장남 조원태 당시 사장이 후계로 추대되는 과정에서 일가 내 분쟁이 발생한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후계구도에 반대하며 KCGI의 손을 잡는다. 반도건설도 참전해 3자연합을 구축하고 사외이사 4인과 감사위원 선임을 골자로 한 주주제안을 했다.
2020년 정기 주주총회 표대결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3자연합의 합산 지분이 45%까지 올라가면서 팽팽한 표대결이 예상됐다. 조원태 회장 측이 델타항공의 지지를 확보하고 국민연금도 회사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KCGI연합의 주주제안은 과반 득표에 실패하고 부결된다.
이후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추가 우호지분으로 떠오르며 KCGI의 지분으로는 승산이 어렵게 됐다. 결국 2022년 지분을 매각한다. KCGI의 한진칼 수익률은 80%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대한항공의 지배구조가 사회적 논의에 올랐고 총수 일가의 책임경영 압박이 커졌다. 성과다. 또 산은은 투자의 조건으로 독립적 감독기구 설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간 경영권 분쟁으로 경영 공백과 내부 혼란이 컸고 주가는 분쟁의 시기에만 올랐을 뿐 자신의 체력으로 상승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