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3세로 넘어갈 수록 헤리티지는 사라진다는 이야길 나눴다. 2세까지는 선대 회장을 따라 현장을 뛰고 아직 덜 성장한 기업을 더 키운 경험을 뼈에 새겼다면 3세부터는 검머외 도련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미 다 여문 기업을 물려받은 3세 중에서는 가끔 기업의 방향타를 조금 더 세련된 쪽으로, 조금 더 젊은 회장에게 어울리는 쪽으로 돌리고자 한다. 3세들에게 갈증은 결핍이 아니라 자기증명이다. 아버지의 위대함은 인정하면서도 그 잔상을 나로 덮고 싶은 것이다. 자기인정 욕구는 재벌3세라고 다르지 않다.
혹은 3세에게 가업이 별로 멋지지 않은 경우다. 제조업 강국인 만큼 제조업 기반의 재벌이 많은데 젊은 회장이나 황태자가 이 가업을 거부하는 일도 왕왕 있다. 그렇다고 알토란 기업의 승계를 포기할 것은 아니어서 신사업을 키우거나 후계자가 싫어하는 부문을 팔고 남은 사업을 확장하려는 시도도 한다. 최근 몇몇 제조기업들이 이런 의심을 받았다.
존경받는 3세는 아직 이를까. 선례들이 분명히 있다. 로고 하나만으로 제품의 품격을 나타내는 루이비통의 LVMH나 3세 회장과 기업의 헤리티지가 좋은 교차점을 만든 현대차그룹이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의 자녀들은 각 브랜드를 맡을 때 자기의 색채를 내기 보다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먼저 배운다. 정의선 회장은 현장과 품질이라는 선대의 유산을 버리지 않으며 3세 경영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로 꼽힌다.
또 다른 공통점은 밥이다. 아르노 회장은 다섯 자녀들과 한달에 한번 점심식사를 함께한다. 테그호이어 등 내로라하는 브랜드를 이끄는 수장들은 이 90분간의 식사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는다. 후계자로 선택받기 위한 겉치레일 수도 있지만 헤리티지를 이어야 승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는 뜻이다. 현대가의 아침식사는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유명했다.
3세가 꼭 기업의 헤리티지를 지켜야하는가를 반문할 수 있다. 슈퍼집 아들이 꼭 슈퍼마켓만 하란 법은 없다. 그렇다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떠나면 될 일이다. 경제적 해자(Moat)를 갖춘 가업의 색을 바래가며 새 사업을 시작하는 이유가 고작 자기증명이라면 여러모로 낭비다.
가업승계가 여전히 이뤄지며 모종의 응원을 받는 이유는 피를 타고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문의 풍토와 가업의 기억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다음 선택을 더 책임있게 할 수 있다는 기대다. 진짜 자기증명은 낡은 먼지만 털어내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 현대화하는 영민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