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들이 예년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공개 캠페인에 나서고 있다. 통상 정기주주총회 직전 기업과의 비공개 대화를 공개 전환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주총을 8개월 이상 앞둔 시점부터 기업 압박에 나서는 사례가 잇따른다. 개정 상법 시행으로 행동주의 펀드의 협상력이 한층 커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기업과의 협상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 뒤 내년 정기주총까지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최근 쿼드자산운용은 코스피 상장사 영원무역대상으로 전개해 온 비공개 주주관여를 공개 캠페인으로 전환했다. 쿼드운용은 영원무역 측에 △총주주환원율 확대 △내부거래 제거 △합리적 경영진 보상체계 구축 등을 통해 저평가 상태를 해소할 것을 요구했다. 쿼드운용 관계자는 "그간 꾸준히 영원무역 경영진과 비공개 대화를 이어왔지만 크게 진전이 없어 공개 캠페인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달 말에는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가 에스원대상 행동주의를 공개 전환했다. FCP는 △3개년 목표주가 발표 △5개년 사업비전 제시 △잉여현금 플랜 △주주와 투명한 소통 △이사회 상법 준수 등을 공개 주문했다. VIP자산운용도 월덱스 상대로 지난 3월 정기주총 전 공개 캠페인을 추진해 회사 측 안건을 부결시킨 데 이어 최근 임시주총에서도 반대표를 결집시켜 다시 한번 부결을 이끌어냈다.
영원무역과 에스원, 월덱스 등 타깃 기업은 모두 12월 결산법인으로 매년 3월 정기주총을 개최한다. 정기주총까지 8개월 이상 남겨둔 시점에서 공개 캠페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동안 행동주의 펀드들은 하반기 동안 기업과 비공개 대화를 이어가다 협상이 결렬될 경우 정기주총 시즌 직전 공개 압박에 나섰다. 시장에서는 협상 기간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총 표대결 등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다.
이 같은 전략 변화에는 개정 상법 시행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이달 중순부터 감사위원 선·해임 시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해 3%까지만 인정하는 규정이 시행된다. 오는 9월부터는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가 집중투표제를 의무 도입해야 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상도 기존 1명에서 2명으로 확대된다. 행동주의 펀드 입장에서는 이사회 진출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졌다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행동주의 펀드 입장에서 내년 정기주총 승산이 이전보다 높아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만큼 기업과의 협상을 조기에 시작할 유인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대로 기업들도 보다 이른 시점부터 주주와의 소통과 의결권 확보 전략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공개 캠페인이 장기화될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내년 정기주총까지 다양한 대응 시나리오를 검토해야 하는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행동주의 펀드의 운용 성과도 공개 캠페인을 앞당기는 배경으로 꼽는다. 행동주의 펀드는 기업가치 제고를 통해 수익률을 높여야 신규 자금 유치와 펀드 운용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2023년 11월 설정된 쿼드운용의 행동주의 펀드 '쿼드인게이저5 일반사모투자신탁'(순자산 270억원)의 지난달 29일 기준 누적 수익률은 36%에 그쳤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 성과 265%와 비교하면 한참 부진하다.
법조계 관계자는 "개정 상법 주요 내용들이 이달 실시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펀드 공격에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특히 정기주총까지 이슈를 끌고갈 경우 기업 입장에선 불리할 수 있기 때문에 펀드 입장에선 고삐를 당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시장 양극화로 비반도체 기업 주가가 부진한 것도 운용사 공격적 성향을 강화하는 요소가 됐다"고 덧붙였다.
행동주의 펀드 운용사가 사외이사와의 대화 가능성도 열어놓은 만큼 이사회 차원 대응에도 눈길이 쏠린다. 지난해 상법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기존 회사에서 주주 전체로 확대됐다. 주주들이 이사회 판단 시비에 대해 직접 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FCP 관계자는 "전방위적으로 문을 열어놓고 회사 경영진과 이사회 내 사외이사들과도 대화를 이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