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은 기업의 위기 때마다 시장에 등판한다. 기업 구조조정과 경영 정상화 과정에서 주요 주주에 이름을 올린 산업은행은 이사회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기업 의사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다만 산업은행 영향력 아래 선임된 사외이사들이 지금까지 실제 독립적인 감시자 역할을 수행했는지 아니면 채권단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에 머물렀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 대기업 살리기 명분 속 사외이사 공급처 역할
산업은행법상 산업은행의 역할은 산업의 개발과 육성을 촉진하기 위해 일반 상업은행이 다루기 어려운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고 관련 분야 금융을 지원하는 데 있다. 다만 수천억원에서 수조원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되는 구조조정이나 기업 정상화 과정에서산업은행은 단순 채권자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투자금 회수와 경영 정상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사회 경영에 관여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거나 대규모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주요 주주 지위를 확보하면 사외이사 추천이나 경영진 선임에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최근 20년 간 산업은행이 이사회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기업은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시작으로 △현
대상선(현
HMM) △한국GM △
한진칼 △ 아시아나항공 △STX조선해양(현 케이조선) 등 다양했다.
다만 산업은행 영향력 하에서 선임된 이사들이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서울 소재 대학교수 출신 한 상장사 사외이사는 "산업은행이 경영에 개입한 이후 바뀐 이사회 면면을 보면 산업은행 출신뿐 아니라 정부부처 곳곳에서 전관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진입했는데 이들이 경영 전문성을 갖고 실질적 관리 감시 역할을 했는지 여부는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국내외 연구에서는 국책은행이 기업 이사회에 진입했을 때 일반 주주를 대표하는 역할보다는 사실상 채권단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뷴석도 제기된다. 산업은행이 기업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전·현직 정치권 인사들이 이사회에 대거 진입한 사례를 두고 산업은행을 매개로 정부 영향력이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될 수 있다는 우려도 시장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 같은 논의는 최근 금융당국이 국민연금이 금융지주 등에 대한 주주권 행사 과정에서 사외이사 후보를 직접 추천케 하는 방식을 검토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분위기다. 공적 성격을 가진 기관이 민간기업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어떤 인사가 선임돼 왔고 이들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기업 지배구조와 경영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정치인 출신 이슈부터 경영권 분쟁 개입 논란도
최근 20여년 사이 산업은행이 오랜기간 경영에 관여한 기업으로는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이다. 대우조선해양은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이후 채권단 관리 체제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산업은행은 채권 출자전환 등을 거쳐 최대주주에 올라섰다. 그리고 2023년
한화그룹에 매각하기까지 20년 넘게 기업 경영에 관여했다. 2015년 대규모 분식회계와 해양플랜트 부실이 드러난 이후에는 구조조정 작업을 총괄키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은행은 대표이사 선임과 사외이사 구성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영 정상화 계획 수립과 자산 매각, 인력 구조조정 등 주요 의사결정이 산업은행 관리 하에서 이뤄졌다. 재계에서는 당시 대우조선해양을 두고 '사실상 국영기업'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 시기 대우조선해양 이사회에는 정치인 출신을 비롯해 국책 연구기관 인사, 대학교수, 금융권 출신 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서 이사회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분식회계 사태를 사전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은 논란으로 남아있다. 당시 이사회 역시 수년간 누적된 손실과 회계 문제를 적시에 포착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산업은행이 선임 과정에서 직간접 영향력을 행사해 이사회에 진입한 이사들이 경영 감시자로서 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남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진칼도 빼놓을 수 없다. 산업은행은 2020년 코로나19 여파로 항공업계가 위기에 빠지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려면
대한항공 최대주주인
한진칼도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산업은행은
한진칼 유상증자에 5000억원, 교환사채 인수에 3000억원 등 총 8000억원을 투입했다. 그러면서 산업은행은
한진칼 지분 10% 이상을 확보했다.
산업은행은 사외이사 추천권을 확보했고 2022년 관련 인사들이 이사회에 합류하면서 이사회 규모가 대폭 확대했다. 눈에 띄는 점은 당시 조원태 회장 측과 KCGI·조현아·반도건설로 구성된 3자 연합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조 회장과 3자 연합 간 경영권 분쟁 속에서 산업은행 측 이사들은 사실상 조 회장 우군 역할을 했다. 산업은행이 항공산업 재편이란 명분 속에서 사실상 경영진에 힘을 실어준 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