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 안건 대부분은 조용히 통과된다. 9할 이상의 압도적 찬성표가 쏟아지는 게 대부분이다. 2026년 정기주총에선 다른 모습이 보인다. 이사 보수 한도, 사외이사 개별 선임, 자기주식 처분 계획 등 과거엔 형식적이었던 안건들이 팽팽한 표 대결로 번지거나 부결로 끝났다. 상법 개정이 진행되고 집중투표제·자기주식·이사 독립성 등 지배구조 쟁점이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더벨은 국민연금을 비롯해 기관투자자와 주요주주들의 의결권 행사 내역을 토대로 주주총회 의결권이 갖는 의미를 진단해본다.
올해 정기 주주총회 시즌은 조용한 통과라는 기존 공식에서 벗어난 양상을 보였다. 일부 안건은 실제 부결로 이어지면서 주주총회가 형식적 절차를 넘어 실질적인 의사결정의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상법 개정 논의와 맞물린 정관 변경과 이사회 구조 개편 안건이 대거 상정되며 기관투자자와 기업 간 견제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올해는 기업과 주주 간 힘의 균형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상법 개정이라는 제도 변화가 촉발한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기관투자자의 영향력 확대와 주주권 행사 방식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형식적 통과가 아닌 실질적 검증의 단계로 접어든 주총은 향후 기업 지배구조 논의의 핵심 무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더해 3월부터는 안건의 찬반비율까지 공시되면서 최대주주 이외의 주주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가결된 안건 가운데에도 60%대의 찬성률로 주총문턱을 넘어선 것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 비롯한 기관 반대 이어져, 부결 사례도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정관 변경 안건을 둘러싼 충돌이다.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이사 수 조정 등 이사회 권한과 구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안건이 줄줄이 올라왔다. 기업들은 제도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었지만 기관투자자들은 이를 지배력 유지 수단으로 해석하며 광범위하게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한 기관의 반대는 특정 안건에 국한되지 않고 정관 변경, 이사 선임, 보수 한도 등 전방위로 확산됐다.
실제 결과에서도 이러한 긴장관계는 수치로 확인된다. 한국앤컴퍼니에서는 이사 수 변경, 이사 결격 및 당연 퇴임 사유 추가,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선임 안건 등이 잇따라 부결됐다. 통과된 일부 이사 선임 안건 역시 찬성률이 60%대에 머물며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과거 같으면 무난히 통과됐을 안건들이 실제로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집중투표제 관련 정관 변경 안건에서는 제도와 현실의 충돌이 드러났다. SKC, SK증권, SK바이오사이언스, CJ CGV, 하이트진로, 한화투자증권, 한화손해보험, 한화솔루션 등 주요 대기업 계열사에서는 관련 안건이 잇따라 부결됐다. 이는 집중투표 관련 정관변경에는 3%룰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법 제542조의 7에 따르면 상장회사가 정관으로 집중투표를 배제하거나 그 배제된 정관을 변경하려는 경우에는 의결권 없는 주식을 제외한 발행주식총수의 3%를 초과하는 수의 주식을 가진 주주는 그 초과하는 주식에 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기업일수록 오히려 안건 통과가 어려워지는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한화솔루션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 삭제 안건 부결 관련 공시.
◇찬반비율 공개, 주주반응 확인 수월
가결된 안건에서도 과거와 다른 흐름이 감지된다. 찬반 비율이 공개되면서 어떤 안건에 대해 주주들의 반발이 컸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올 1월29일 금융위원회는 주주총회 표결결과 공시 등 기업공시 개선방안을 반영한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과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코스닥시장·코넥스시장 공시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그 결과 올 3월부터 가결여부에 더해 의안별 표결 결과(찬성률, 반대·기권 등 비율+찬성주식수, 반대·기권 등 주식수)가 주주총회결과 공시에 담기고 된다.
사례를 살펴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사 임기를 2년에서 3년으로 확대하는 안건이 69.8% 찬성으로 통과됐다. 상법상 특별결의 요건인 출석 주주 의결권의 2/3 이상+발행주식총수의 1/3 이상을 동시에 충족하긴 했지만 출석 주주 가운데 30%가 넘는 반대표가 확인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단순히 통과 여부를 넘어 주주 간 이견이 실질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효성중공업의 사례는 주총 의결 구조의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19일 열린 효성중공업 정기주총에서는 이사수 상한을 16명 이내에서 9명 이하로 바꾸는 내용 등이 담긴 정관 변경 안건이 부결됐다. 해당 안건은 58.8%의 찬성률을 확보했지만 특별결의 요건인 출석 주주 3분의 2(66.7%) 이상 찬성을 충족하지 못했다. 이는 과반 찬성만으로는 안건 통과가 어려운 구조 속에서 반대 의결권의 영향력이 실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국민연금은 부결된 안건에 대해 "정관으로 이사의 수 상한을 축소해 일반주주의 주주제안 및 집중투표제 청구 가능성을 약화시키는 반면 정관변경을 하지 않아도 적정 이사회 규모로 운영이 가능한 점을 감안해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몇 년간 누적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의 참여가 확대되면서 주총의 의사결정 구조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