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기업 이사회에도 AI 전문가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AI가 투자부터 업무 방식까지 기업 경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만 AI 전문가를 독립이사로 선임하는 것이 실제 경영 의사결정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또 다른 문제다. 자칫 ‘보여주기식’ 선임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30년 전부터 AI를 연구한 국내 대표 'AI 전문가'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
(사진)가 바라보는 AI 전문가의 역할은 단순히 'AI를 잘 아는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기업이 AI를 어디에 적용해야 하는지부터 경영진이 세운 AI 전략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 AI를 활용한 결과 실제 기업가치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등을 따져 묻는다. 결국 AI를 기업의 의사결정에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판단을 돕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다만 그 방식은 기업마다 다르다. 지니뮤직과 예스24를 거쳐 현재 미래에셋생명과 아시아나IDT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 교수는 기업의 상황에 따라 AI 전문가가 정반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영진의 AI 투자를 점검하며 제동을 걸기도 하고, 반대로 AI 관련 의제를 먼저 제안하며 경영진을 끌고 가기도 한다.
◇미래에셋생명에서는 '브레이크', 아시아나IDT에서는 '액셀'
이 교수가 몸담은 두 이사회는 AI를 바라보는 방식부터 다르다. 미래에셋생명은 AI 활용면에서 선도적인 기업이다. AI를 단순한 업무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서 투자
대상이자 기업의 전략적 판단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사회에서는 최근 스페이스X, 리벨리온 투자 등 AI와 관련한 투자 의사결정을 실제 안건으로 다뤘다.

미래에셋생명은 투자뿐 아니라 평가에도 AI 관련 지표를 선제적으로 반영했다. 최고경영책임자(CEO)의 핵심성과지표(KPI) 20~30개 항목 가운데 10~15%가 AI 활용도와 관련돼 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중심으로 AI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장단을
대상으로 관련 교육도 진행하는 등 경영진 주도의 AI 전환이 빠르다. 이런 기업에서 AI 전문가의 역할은 오히려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쪽에 가깝다.
이 교수는 “미래에셋은 AI 관점에서 엄청 앞서가는 조직”이라며 "그래서 이사회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영진의 (AI 관련) 투자를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이 교수는 "지금은 KPI에서 AI 활용도만 측정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를 활용한 성과"라며 “내년부터는 AI를 활용한 가치 창출을 평가하는 수준으로 확대하자고 조언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아시아나IDT에서는 독립이사들이 AI 관련 의제를 먼저 이끄는 '액셀' 역할을 하고 있다. 독립이사들 사이에서 AI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먼저 나왔고 이에 AI 기술연구소장이 이사회에서 관련 사업을 직접 설명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이 교수는 “아시아나IDT는 아직 합병이라는 과제가 있는 만큼 AI 관련 논의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업 특성상 AI의 중요성이 큰 기업”이라며 “독립이사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관련 의제를 제안하고 있다”고 말했다.
◇AI 전문가 선임은 '트렌드', "아직은 헝그리하다"
이 교수는 현재 기업 이사회에서 AI가 논의되는 수준을 두고 "아직 헝그리하다”고 표현했다. AI 투자에는 적극적인 기업도 내부 업무와 핵심 사업을 AI로 어떻게 바꿀지, 이를 통해 어떤 성과를 낼지를 논의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AI 전문가를 독립이사로 영입하는 흐름은 한발 떨어져 볼 필요가 있다고 바라봤다. AI 전문가를 영입하려는 흐름은 하나의 '트렌드'일 뿐 모든 기업에서 AI 전문가가 반드시 필요한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난해 하반기 이사회의 트렌드는 정보보안이었다"며 "이사회는 그때그때 필요한 전문가를 모셔 도움을 받고자 하는 요구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AI가 중요한 경영 의사결정에 들어오기 시작한 기업이라면 해당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사회에 필요할 수 있다. 그는
신한은행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신한은행은 2017년 IBM 왓슨 도입을 앞두고 이 교수에게 3주간 컨설팅을 의뢰했다. 이사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이사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었다. 그는 당시 투자에 부정적인 의견을 이사회에 전달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결국 도입을 결정했고 이후 프로젝트는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교수는 "당시 이사회에 전문가가 없어 외부 전문가 의견만 듣고 결정한 결과였다"며 "AI 전문가가 이사회에 있었다면 의사결정이 더 잘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AI는 계좌가 없다"…결국 책임은 사람
그렇다면 AI가 이사회 구성원을 대체할 수 있을까. 30년 전부터 AI를 연구한 이 교수는 AI가 이사회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역할은 어디까지나 ‘참고’에 그쳐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AI는 계좌도 없고 법적인 책임도 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AI는 잘못된 판단을 내려도 법적·금전적 책임을 질 수 없는 만큼 최종 판단과 책임은 사람의 몫이라는 의미다. 실제 AI 알고리즘을 활용한 투자 판단이 잘못됐을 경우에도 책임은 해당 업무를 맡은 부서장에게 돌아간다.
이 교수가 내다보는 AI의 미래는 ‘똑똑한 도구’의 등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AI가 판단을 돕는 존재를 넘어 책임과 규율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인간 사회가 답해야 할 질문도 남아 있다. 그렇기에 '계좌가 없는' 지금의 AI가 지닌 한계가 영영 고정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이사회에 AI가 들어가는 게 조언 수준에 그칠지, 아니면 AI에게도 계좌를 만들어주고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할지는 또 다른 문제"라며 "언젠가는 그런 체제가 필요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