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기이사는 기업의 위기극복 전략과 조직 내 권력 지형도를 압축한 ‘코드’와 같다. 사내이사에 이름을 올린 비오너 출신 임원들의 면면을 보면 기업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사내이사를 들여다보며 이들의 경영전략과 조직 위상, 그리고 기업을 움직여온 핵심 인물들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SK하이닉스는 특정한 원칙보다는 그때 그때 기업이 처한 상황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사내이사를 유연하게 구성하는 특성을 보인다. 초기 SK의 문화를 이식한 김준호 전 사장, 불황기를 헤쳐 나갈 글로벌 마케팅 전략을 주도했던 오종훈 전 부사장, 솔리다임(구 인텔 낸드사업부)의 안착을 이끈 노종원 사장 등 사내이사에 오른 인물들의 면면에서 회사가 극복해야 했던 각기 다른 도전 과제들이 선명히 드러난다.
작년부터 SK하이닉스 이사회에 진입한 안현 사장 역시 낸드 사업의 위기 극복이라는 중대한 미션을 수행 중이다. 20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투입된 솔리다임의 정상화 등에 힘쓰는 안 사장의 사례는 이사회가 단순한 관리·감독 기구가 아니라 기업의 가장 중요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전초기지임을 보여준다.
◇유연한 사내이사 선임 기조, 각기 다른 미션
SK하이닉스는 사내이사 선임에 유연한 기조를 보여왔다. 타사의 경우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항상 사내이사에 선임하거나 특정 보직의 인물을 올리는 등 일관된 ‘법칙’이 있지만 SK하이닉스의 경우 이런 규칙이 크게 관찰되지 않는다.
다만 그때 그때 상황에 적절한 인물을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경향을 보였다. 2013년 초부터 2018년 초까지 5년 동안 SK하이닉스의 사내이사로 활동한 김준호 전 사장은 인수 초기, 현대전자였던 SK하이닉스에 SK의 조직문화를 심는 역할을 크게 했다.
검사출신이었던 김 사장은 서울고법 검사와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을 거쳐 SK그룹으로 이동한 인물이다. 핵심 멤버로 영입된 그였기에 SK그룹에 오자마자 SK 부사장(윤리경영실장), SK에너지 사장 등을 역임했고 특히 SK그룹이 하이닉스를 인수할 때 공동으로 실사단장을 맡았다. 인수 전과정을 맡길 만큼 SK그룹의 큰 방향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SK그룹은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하자마자 코퍼레이트센터란 조직을 만들고 김 사장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연구개발 및 제조 등 기술적 영역을 제외한 재무와 지배구조, 사업운영 등 전반적인 영역을 모두 총괄토록 했다. 박성욱 전 대표가 기술전문가였다면 김 사장이 그 외의 모든 영역을 담당하며 균형을 맞췄다. SK하이닉스의 초기 전략을 세팅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김준호 전 경영지원총괄 사장, 오종훈 전 마케팅/영업총괄 부사장, 노종원 사업총괄 사장(좌측부터)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 사내이사로 활동했던 오종훈 부사장은 불황 속에서 글로벌 수요처를 찾는 핵심 임무를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슈퍼 호황기를 마치고 장기 불황의 터널로 진입하던 때였다. D램 반도체 수요 부진 등이 주요 문제로 지목됐고 이에 따라 마케팅·영업 부서를 더욱 강화했던 시절이었다. 오 부사장이 몸담았던 ‘마케팅·영업부서’의 명칭을 해외시장을 염두에 둔 ‘글로벌세일즈마케팅’으로 바꾸는 등 서버 D램과 5G(5세대) 이동통신, 자율주행차 등 반도체 수요에 대한 대응 전략을 전세계로 넓혔다.
오 부사장의 본업은 반도체 엔지니어였다. 설계 분야에서 다양한 공헌을 했는데 특히 그는 회사가 보유한 기술을 사업과 연계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토대로 상품 기획과 마케팅·영업 영역까지 특기를 넓혔다. 더불어 다년간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활용해 고객 네트워크 확장에 나설 수 있었다. 당시 그는 미국법인인 메모리 솔루션 아메리카(memory solutions America Inc.) 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이 밖에 2022년 사내이사로 활동하던 노종원 사장의 경우 ‘솔리다임(옛 인텔 낸드사업부)’ PMI 작업이 중요하던 시기 등기이사에 올랐던 인물이다. 11조원 인수자금이 들어간 대형 M&A였기에 당시 SK하이닉스에 굉장히 무게감 있는 사업이었다.
SK그룹의 전략통이자 주요 M&A 업무를 주관한 노 사장은 SK텔레콤에 입사해 사업전략, 사업개발 등 전략부서에 주로 몸담았다. SK그룹에서 하이닉스 인수 TF 실무, 도시바메모리(키옥시아) 투자, ADT캡스(현 SK쉴더스) 인수, 인텔 낸드사업(솔리다임) 인수, 매그나칩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부 투자 등을 성사시킨 주역이다. 2021년 12월 솔리다임(옛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의 1차 클로징을 완료하면서 이 회사의 안착이 회사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고 이는 노 사장이 이사회에 진입한 시기와 맞물린다.
노 사장은 SK하이닉스 사내이사와 동시에 솔리다임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2022년 7월엔 아예 솔리다임 최고사업책임자(CSO)를 맡아 PMI 작업을 담당했다. 2023년 3월부터는 솔리다임 경영에 집중하기 위해 SK하이닉스 사내이사에서 물러났고 현재 솔리다임의 대표이사로 있다.
◇현재 사내이사 안현 사장, 낸드 솔루션 분야 시너지 발굴 *안현 현 SK하이닉스 사내이사(개발총괄 사장) 현재 SK하이닉스의 사내이사인 안현 사장 역시 ‘낸드 전문가’로 ‘솔리다임 살리기’ 특명을 안고 등기이사에 올랐다는 평을 받았다. 경영전략실장, 낸드개발기획그룹장, 미래연구추진단 담당 등을 역임해 온 인물이다. 사내이사 입성 당시 SK하이닉스의 솔루션개발총괄을 맡았던 그는 솔리다임 기술 총괄도 겸직했다. 2024년 초 SK하이닉스가 낸드 솔루션 사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새롭게 조직한 컨트롤타워인 '앤에스커미티(N-S Committee)' 역시 안 사장이 이끌고 있다.
안 사장의 이사회 참여를 놓고 시장은 낸드 솔루션 분야의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는 판단이 깔린 인사로 풀이했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로 2020년 말 인수된 후 3년간 8조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의 회생을 위해 7조~8조원 규모 자금을 대여하기도 했다. 인수대가로 인텔에 지급한 약 11조원을 더하면 솔리다임에 쏟아부은 금액은 20조원에 육박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SK하이닉스의 인적·물적 리소스 투입 덕분에 솔리다임이 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솔리다임은 지난해 처음으로 연간 흑자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성장세를 예고했다. 올해는 낸드 시장의 고성장에 힘입어 SSD(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시장 공략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