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기이사는 기업의 위기극복 전략과 조직 내 권력 지형도를 압축한 ‘코드’와 같다. 사내이사에 이름을 올린 비오너 출신 임원들의 면면을 보면 기업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읽을 수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사내이사를 들여다보며 이들의 경영전략과 조직 위상, 그리고 기업을 움직여온 핵심 인물들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 내 핵심 성장동력으로 평가받는다. 그룹 전체 실적을 견인하며 기술력과 시장 지위를 통해 그룹의 미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쌓은 경영 커리어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 이사회엔 항상 적어도 한 명의 그룹과 관계된 인물이 이사진 멤버로 배치됐다. 최태원 회장이기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위원장이기도, SK하이닉스의 모회사 대표이사이기도 했다. 이들은 SK하이닉스와 그룹 간 교류와 지배력 행사 채널의 통로를 담당해왔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2월 SK그룹 품에 안겼다. 당시 인수자금 3조4000억원은 그룹 사정으로 보면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최 회장은 반도체의 미래를 밝게 보고 과감히 M&A를 단행했으며 이는 최 회장 최고의 성과로 남았다.
당시 승부수였던 SK하이닉스를 그룹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것이 최 회장이 떠안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SK그룹은 SK하이닉스 이사회를 통해 그룹 혹은 모기업 간 소통 창구를 만들었다.
인수 즉시 최태원 회장이 SK하이닉스 대표이사 회장 자격(사내이사)으로 이사회에 입성했다. 당시 이를 놓고 갓 인수된 SK하이닉스의 그룹 내 중요도가 얼마나 높은지 가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이에 더해 SK하이닉스이 모회사였던 SK텔레콤의 CEO 하성민 사장이 기타비상무이사로 들어왔다. SK텔레콤과 하이닉스 간 사업적 시너지는 사실상 없었지만 SK텔레콤이 풍부한 유동성으로 그룹의 캐시카우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당시 인수주체로 나섰다. 사실상 SK하이닉스와 직접적 지분관계로 얽힌 건 SK텔레콤이었기에 모회사와의 긴밀한 소통이 필요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임형규 전 SK수펙스추구협의회 ICT 위원회 위원장이 SK하이닉스 이사회에 들어왔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는 SK그룹 내의 최고의사결정기구다. 2014년 최 회장이 구속수감되면서 '총수 장기공백' 사태가 벌어졌고 당시 SK하이닉스 및 SK이노베이션 등기이사에서 빠지게 됐다.
그를 대신해 SK하이닉스에 오른 임 부회장은 원래 '삼성전자 출신' 반도체 전문가였다. 삼성의 연구개발(R&D) 문화, 조직 관리 방식 등에 대한 노하우를 SK그룹 정보통신기술(ICT) 계열사에 접목시키기 위해 영입됐다. 최 회장이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허락까지 구하고 삼고초려 끝에 데려온 인재로 잘 알려져있다. 최 회장은 그에게 SK수펙스추구협의회 ICT 위원회 위원장을 맡겼고 2014년 3월 SK하이닉스의 사내이사로도 선임했다. 부회장 직함을 주고 SK하이닉스의 안착이란 특명을 내렸다.
2016년엔 임형규 부회장과 함께 박정호 당시 SK 대표이사 사장(부회장)이 SK하이닉스 기타비상무이사가 됐다. 2015년 8월 지주사 SK가 탄생했고 이듬해 첫 정기주주총회 때 박 부회장이 SK하이닉스 이사회에 입성했다. 기타비상무이사의 경우 사내·사외이사와 동일한 지위를 가지지만 자격요건이나 임기제한·겸직제한 등이 없다. 이에 따라 SK그룹은 이 기타비상무이사를 SK하이닉스 이사회에 요긴히 활용했다.
◇SK텔레콤→SK스퀘어로 모회사 변경, 하이닉스 이사회도 변화 *박정호 전 SK하이닉스 부회장 겸 SK스퀘어 부회장
박정호 부회장은 무려 8년 동안이나 SK하이닉스 이사회에 있었다. 맨 처음엔 SK 대표이사였지만 2017년부터 2022년까지는 SK텔레콤 대표이사 자격이었다. SK그룹은 과거 SK텔레콤을 SK그룹의 ICT 계열사들을 거느리는 중간지주사로 전환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는데 박 부회장이 이에 중심 역할을 했고 2017년 SK텔레콤의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박 부회장은 SK그룹이 신세기통신, 하이닉스반도체 등 굵직한 인수합병을 추진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통합 SK 출범을 이끌어 낸 구조조정 전문가로도 꼽힌다. 모회사 대표이사였던 만큼 당연히 SK하이닉스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그는 SK텔레콤의 대표이면서도 2020년엔 SK수펙스추구협의회 ICT위원회 위원장으로 모회사와 그룹 모두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무게감 있는 그룹 인사가 SK하이닉스의 기타비상무이사가 된 건 그만큼 SK하이닉스의 그룹 내 위상이 높다는 방증이었다.
박 부회장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는 SK하이닉스 대표이사(각자대표)도 겸직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는 SK하이닉스가 2018년 슈퍼 호황기의 영광을 마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던 때로 그룹에서도 우려가 높았다. 박 부회장은 당시 SK하이닉스의 기업문화 부문을 맡으면서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큰 그림의 전략과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찾는 데 주력했다.
박 부회장은 2021년 11월엔 중간지주사가 된 SK스퀘어의 대표이사가 됐다. SK스퀘어는 당시 SK텔레콤으로부터 분할해 투자회사로 출범했으며 박 부회장이 첫 키를 잡았다. SK하이닉스도 SK스퀘어 밑에 놓이게 되면서 박 부회장이 쭉 SK하이닉스 기타비상무이사로 활동했다.
2024년엔 박성하 SK스퀘어 대표이사 사장이 SK하이닉스 기타비상무이사에 올랐다. 다만 그 해 6월 성과 부진으로 인한 경질성 인사로 SK스퀘어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SK하이닉스 기타비상무이사 자리는 임기를 유지했다.
*장용호 SK 대표이사(좌), 한명진 SK스퀘어 대표이사(우)
올 들어선 한명진 SK스퀘어 대표이사 사장이 SK하이닉스의 기타비상무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와 더불어 장용호 SK 대표이사 사장도 같이 SK하이닉스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됐다. 한 회사에 그룹 측 인사가 두 명이나 기타비상무이사로 들어가는 것은 SK 내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올해부터 SK하이닉스와 더불어 SK온에도 기타비상무이사가 2명씩 배치됐는데 그만큼 두 회사가 그룹 내 중요한 계열사란 의미로 풀이됐다. SK하이닉스는 그룹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캐시카우, SK온은 그룹의 내일을 위한 미래산업 경향이 강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SK그룹의 경영성과(계열사 순이익 합산)는 2021년 18조4059억원에서 2022년 11조1004억원, 2023년에는 6592억원으로 급감했다. 이는 SK하이닉스가 2021년 9조6162억원, 2022년 2조2417억원, 2023년 마이너스(-)9조1375억원을 기록한 것과 비슷한 추세다. 반도체 경기가 좋을 때는 그룹 전체 순익의 절반을 담당하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올 1분기에만 무려 7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며 두 분기 연속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계절적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는 다른 경쟁력을 입증한 성과로 풀이됐다. 지난해엔 연간 기준 영업이익이 삼성전자 DS부문을 처음으로 추월하기도 했다. AI 메모리칩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하면서 수익률이 크게 개선된 영향이다. 올해 역시 빅테크를 중심으로 AI 인프라 구축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만큼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