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펀드가 KT&G의 산하 재단·복지기금에 대한 자사주 출연 목적을 문제 삼은 법정 다툼에서 전직 이사들이 승소했다. 법원은 이사회 의사록에 ‘회사 핵심 우호지분 확보’라는 문구가 적힌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자사주 출연의 실질적 목적이 경영권 방어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시장에서는 법원이 우호지분의 존재와 이사들의 배임 책임 사이에 엄격한 선을 그은 보수적 판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대전지방법원 제11민사부는 지난 12일 행동주의 펀드 플래쉬라이트캐피탈파트너스(FCP)의 특수목적법인 아그네스가 백복인 전 대표를 비롯한 KT&G 전직 사내·독립이사 18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소송비용도 원고 측이 부담하도록 했다. 아그네스는 소 제기 당시 KT&G 지분 0.37%를 6개월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 지난해 하반기 대부분을 처분해 현재 2주를 갖고 있다.
더보드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아그네스 측은 KT&G 이사회가 산하 장학재단과 공제회, 공영기업 및 사내근로복지기금에 자사주를 무상 출연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다. 자사주가 외부 법인에 넘어가면서 의결권이 부활했고 이 의결권이 이사 연임 등 경영진 지배력 유지에 활용됐다는 논리였다. 아그네스는 각 자사주 처분에 관여한 이사들이 다른 이사들과 연대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소송 대상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출연한 자사주 68만1123주다. 처분 당시 종가를 적용한 전체 청구액은 약 698억원이다. 아그네스 측은 2001년경부터 KT&G가 관계법인 등에 출연한 자사주를 모두 합하면 1085만여주, 의결권 기준 약 9.9% 우호지분이 형성됐다고 봤다. 의결권이 없던 자사주를 관계법인에 넘겨 의결권을 부활시키고 이를 경영진의 지배력 유지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번 소송은 행동주의 펀드가 과거 이사회의 자사주 처분 결정에 대해 이사 개인의 손해배상 책임을 직접 물었다는 점에서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회사가 자사주를 관계법인에 출연해 우호지분을 형성한 경우 이를 어디까지 정당한 경영판단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특히 지난해 상법 개정으로 이사가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명문화되면서 이번 판결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는 분위기였다.
재판부는 2015년 10월 KT&G 이사회 의사록의 자사주 처분 안건 제안 이유에 ‘회사 핵심 우호지분 확보’라는 문구가 기재된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문구를 곧바로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강화 의도로 해석하진 않았다. 회사가 재단 등과 장기간 밀접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점에 비춰보면 사회공헌·복지사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려는 의미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게 재판부 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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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받은 법인들이 실제 주주총회에서 이사회 추천 안건에는 찬성하고 주주제안에는 반대한 사실도 결정적 증거로 이어지진 못했다. 다수의 주주들 역시 이사회 추천안에 동의했고 해당 안건이 명백히 불합리하거나 부당했다는 자료가 없었던 만큼 경영진 의견과 같은 취지에서 표를 던졌다는 행위만으로 출연 당시의 목적까지 경영권 방어였다고 소급해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출연 규모도 따졌다. 소송 대상 주식은 KT&G 발행주식 총수의 약 0.5%로 회사가 보유했던 전체 자사주의 5~6% 수준이었다. 재판부는 20여년 동안 이뤄진 자사주 출연을 합산한 9.9%라는 수치만으로 각각의 처분이 처음부터 동일한 경영권 방어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누적된 결과보다는 개별 처분 당시의 목적과 경영상황을 따로 살피는 게 합리적이라는 취지였다.
현금 대신 자사주를 출연한 결정 역시 이사회의 경영판단 범위로 인정했다. 자사주를 받은 법인이 이후 배당을 재원으로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회사가 더 적은 재산을 출연하고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 오히려 KT&G의 재산상 손해를 줄인 선택으로 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재계 측이 설명한 자사주 운용 논리를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우호지분 형성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판단은 아니다. 법원은 '핵심 우호지분'이라는 내부 표현과 경영진에 우호적인 의결권 행사 정황까지 확인했다. 다만 이사의 책임을 인정하려면 이를 넘어 자사주 출연의 실질적 또는 주된 목적이 경영권 방어였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한다고 봤다. 우호지분이 실제 형성되고 이후 경영진에 우호적인 표결이 이뤄졌다는 결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시장에서는 재판부가 사안을 보수적으로 판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자사주를 활용한 우호지분 논란에서 개별 처분 당시의 목적과 절차, 규모를 우선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한 셈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사회 의사록 상 우호지분 확보라는 표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 경영판단 재량을 폭넓게 인정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FCP 관계자는 "현재 항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