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의 상법 개정 이후 국내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영역이 커지고 있다. 행동주의 펀드는 배당과 자사주 소각을 넘어 이사회와 자본배분 전략까지 요구 범위를 넓히고 있고 기업들도 이사회 운영과 투자자 소통 방식을 재정비하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theBoard는 상법 개정 이후 행동주의와 기업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기업 이사회는 어떤 역할을 요구받고 있는지 다각도로 살펴본다.
국내 상장사 이사회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다. 상법 개정으로 주주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업 측과 행동주의 펀드 간 협상 무대가 이사회로 점차 옮겨가고 있는 분위기다. 기업들은 공개 분쟁을 피하기 위해 이사회 운영 방식을 손질하고 자본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과거 주주총회 시즌 이벤트로 여겨졌던 행동주의가 이제는 기업이 상시 대응해야 할 경영 변수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 상법 개정 후광 입은 행동주의, 관건은 이사회
최근 행동주의 펀드의 부상은 어느 정도 예견된 흐름이었다. 직접적 계기는 지난해 상법 개정이었다. 이사회 충실의무 범위가 기존 회사에서 주주 전체로 확대하면서 이사회는 기업가치와 시장평가를 적극 고려해야 하는 환경에 놓였다. 주주 입장에서는 권한이 강화되는 효과로 이어져 이사회 상대로 직접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주주들이 이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다.
여기에 자산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사에 대해서는 정관으로 집중투표제 도입을 배제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과 전자주총를 의무화하는 조항이 추가됐다. 분리선출 감사위원 수도 기존 1명에서 2명으로 확대했고 감사위원 선임 시 최대주주 개인에게만 적용되던 의결권 3% 제한 룰도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을 모두 합산해 3%로 제한하는 것으로 강화됐다. 이사회를 꾸리는 과정에서 최대주주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작아졌다.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신규 투자자를 유치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배당 확대를 비롯해 자사주 소각, 신규 투자, 기업 인수합병, 사업 재편, 보수체계 재편 등이다. 모두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사안들이다. 최근 일련의 상법 개정은 주주의 이사회 참여 문턱을 낮춰 주가 부양에 필요한 조치를 제안하기 쉽게 만들었다. 오너 경영진 의사 중심으로 경영을 영위한 기업은 상당한 변수를 맞이하게 됐다.
[챗GPT가 생성한 기사 관련 이미지]
경영 상황이 기업 입장에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의견을 피력하기는 어려웠다. 지난해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자본시장 정책을 전면에 내걸고 반도체 업황 호황 등에 힘입어 코스피 지수가 연일 치솟아 오르자 정부·여당 주도의 상법 개정 시도가 합리화된 측면이 컸다. 한번 바뀐 법을 다시 되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상당수 기업들은 지난 주총 이사회 규모를 축소하고 이사 임기를 분산하는 식으로 우회 대응했다.
이 사이에서 중요해진 게 이사회 역할이다. 주주 행동주의가 과거에는 주총 시즌에만 한정된 단기 이벤트였다면 이제는 기업 경영진 입장에서 상시 리스크로 확대 변화하면서 외부 시선으로 내부 변화 필요성을 짚어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대학교수 출신 한 상장사 사외이사는 "훌륭한 이사회는 기업과 시장 간 정보 비대칭성을 낮추는 이사회"라면서 "이사회가 시장과 적극 소통하고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사회 오너가와 투자자 사이 가교 역할 대두
하지만 제도가 바뀌었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아니다. 해외에서는 사외이사가 IR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신한지주와 현대차 등 일부 상장사가 IR 행사에 사외이사를 참여시키곤 하지만 극히 이례적이다. 외국인 투자자가 연초 공개 주주 행동주의에 나서고 사외이사 미팅을 요청하자 사외이사 전원이 하나같이 종적을 감추듯 연락을 피했다는 소식은 유명하다.
코스피 상장사 영원무역을 상대로 행동주의를 펼치고 있는 쿼드자산운용 측은 영원무역 측 성기학 회장과 성래은 부회장 등을 포함해 회사 주요 경영진과 2년 가까이 비공식 대화를 나눠왔다. 쿼드운용 측은 꾸준히 주주환원 확대를 통한 주가 부양책 마련을 주문했지만 영원무역 측은 그 이후 현재까지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투자자 IR 행사에서 향후 조 단위 투자에 나설 것이라는 계획을 소개한 것이 전부였다.
당장 펀드를 운용해야 하는 쿼드운용 입장에서 영원무역 답을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쿼드운용은 지난달 말 영원무역에 공개서한을 보냈고 이달 말까지 회신을 요청했다. 사실상 마지막 카드 성격의 조치라는 뜻이다. 이사회 측과 대화의 문도 열어두고 있지만 이렇다 할 미팅이 성사되진 못한 상태다. 영원무역 관계자는 "쿼드운용 측이 보낸 공식서한을 면밀히 검토해서 대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영원무역 최대주주 영향력은 여전히 확고하다. 영원무역은 성기학 회장 일가가 지배하는 YMSA 산하 영원무역홀딩스가 지분 절반 이상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쿼드운용 측 요구를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쿼드운용 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특히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이 현재 지분 10.2%(올 3월 말 기준)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영원무역 측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은 지난 5월 국내 일부 자산운용사를 소집한 미팅에서 행동주의 펀드 출자 의사를 내비친 바 있다. 최근에는 위탁 운용사의 스튜어드십코드 현황을 면밀히 살펴보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여당 주도로 상법이 개정됐고 상법 취지가 주주 권리를 강화하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 최대 리스크는 정치 변수"라면서 "주주 요구를 외면하는 기업으로 낙인찍힐 순 없는 노릇"이라고 강조했다.
기업 지배구조 상 사외이사가 나서기도 쉽지 않다. 최근 6년 간 영원무역 이사회에 몸담았던 정서용 전 사외이사는 성래은 부회장과 스탠포드대 동문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다. 영원무역에 과거 적을 뒀거나 현재 적을 두고 있는 사외이사 중 일부도 오너가 측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갖고 있다. 시장 관계자는 "사외이사가 오너가와 투자자 간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