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더보드 노트

애매한 힘, 큰 책임

이민우 기자

2026-08-20 09:26:18

최근 국내에도 개봉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인 스파이더맨에게는 시리즈 불문 따라붙는 명대사가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 대사는 스파이더맨이 히어로 활동에서 겪는 불행과 고뇌를 응축한 멋들어진 문장이다. 다만 요즘엔 영화 팬 사이에선 "애매한 힘, 엄청나게 큰 책임"으로 변형돼 스파이더맨을 안쓰럽게 보면서도 놀리는 형태로 쓰인다.

대사가 이렇게 비틀린 이유는 실제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의 불행, 고초에 비해 주어진 힘은 크게 인상적이지 않아서다. 가족을 잃고 세상에서 잊혀졌지만 스파이더맨의 힘은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와 지능, 거미줄 정도다. 매력적이지만 마법사, 외계인 등 지구도 손쉽게 파괴하는 괴수가 드글드글한 세계관에선 아쉽다. 스토리, 캐릭터성을 고려한 한계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에 더 큰 힘이 주어졌다면 더 많은 사건을 쉽게 해결하고 덜 불행하지 않았을까.

이런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어쩌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이사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국내 독립이사는 최근 상법 개정의 흐름에 따라 과거보다 책임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가 법률로 명시되면서 소송 사건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졌고 이는 독립이사 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주주 충실 의무 부여 등 책임 강화의 취지 자체는 좋지만 문제는 현재 독립이사에게 주어지는 힘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당장 소송 대응부터 문제다. 기업이 독립이사에게 책임보험을 들어주지만 해당 보험이 주주와의 소송엔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미 특정 기업 사외이사가 주주 소송에서 책임 보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자비로 대응 중이란 이야기도 들린다.

기업의 올바른 의사결정은 다수 소액주주들의 의견과 일부 배치될 때도 있기 마련이다. 독립이사가 소송에 대한 두려움으로 소액주주들의 의견에 기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상황이 옳을지 의문이다. 이미 다수의 독립이사나 독립이사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 상당수가 위험과 책임 부담을 이유로 자리를 고사하는 경우도 크게 늘어났다.

주주와의 소송 문제 말고도 대표이사, 사내이사 대비 독립이사의 권한이나 발언권이 충분한지 따져봐도 의문이다. 여전히 재직 중인 상당수 독립이사가 자신들이 견제해야 할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두려움과 관계없이 강단으로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이는 독립이사도 있지만 이런 이들이 더 늘어나려면 커진 책임만큼 진짜 큰 힘을 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