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본시장에서 기업 밸류업은 여전히 뜨거운 화두다. 연이은 상법 개정을 계기로 행동주의 펀드가 공세를 가세하고 기관투자자 압박이 거세지면서 기업가치 제고 이슈가 시장 전면으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이달 주총 시즌에는 기업들이 실질적인 밸류업 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한편 행동주의 펀드와 표 대결을 벌이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에서는 상장사 체질이 점차 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기업 금융·재무전략(Corporate Finance Stratgy) 분야를 총괄하고 있는 김서하 BCG코리아 MD 파트너(사진)는 최근 더벨과 만나 ''지난 2년이 밸류업 1기였다면 이제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김 MD 파트너는 KPMG 뉴욕 본사 가치평가 전문가로 커리어를 시작해 라자드 뉴욕 본사 투자은행 부문 애널리스트를 거친 뒤 BCG에 합류, 올해로 15년째 근무하고 있다.
최근 수년 사이 기업 경영 환경은 크게 변했다. 정부가 상법 개정 등을 통해 제도적 틀을 구축하며 방향을 제시했고 국민연금 중심의 기관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실제 표 대결을 대비해 모의 주총을 준비하는 곳도 있다. 김 파트너는 "기업이 주주가치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다"면서 "밸류업 정책은 변화의 일부일 뿐, 시장 전체가 기업가치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상장사들이 기업가치 제고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직전 정부가 밸류업 공시 확대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당수 기업들이 밸류업 계획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형식적 정책에 그쳤다는 평가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시장 기대치에 비해 밸류업 공시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실제 최근 2년여 간 밸류업 공시 이후 주가가 의미 있는 수준으로 상승한 사례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김 파트너는 공시 내용의 파편화를 문제 삼았다. 김 파트너는 "밸류업 논의 과정에서 많이 언급되는 대표적 단어가 자기자본이익률(ROE)과 총주주수익률(TSR) 인데 이 지표들이 기업에 각인됐다는 사실은 의미있는 변화"라면서도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실행 전략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작정 'ROE 10% 달성'을 내세울 게 아니라 구체적 실행 방안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서하 BCG코리아 MD 파트너는 더벨과의 인터뷰에서 "밸류업의 본질은 얼마를 벌 것인가에서 나아가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떻게 운용해 나가느냐에 있다"면서 "주주들이 이사회 진입이나 주주환원 확대를 요청하더라도 논리적 대응 방안을 갖춘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지=BCG코리아]
다시 말해 구체적 재무 목표를 제시하고 구체적 자본 배치 계획, 이를 달성하기 위한 사업 방안을 뚜렷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 김 파트너 표현을 빌리면 에쿼티 스토리를 잘 짜야 한다. 그는 "밸류업의 본질은 얼마를 벌 것인가에서 나아가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어떻게 운용해 나가느냐에 있다"면서 "주주들이 이사회 진입이나 주주환원 확대를 요청하더라도 논리적 대응 방안을 갖춘다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지주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금융지주는 2024년 ROE를 10%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주주환원율을 50% 정도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의 밸류업 공시를 발표했다. 현재 해당 금융지주는 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수치를 계속 올려가야 하는가. 김 파트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미 에쿼티(Equity)가 날씬해진 상태라면 수익성(Return)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재배치해야 한다."
김 파트너는 "행동주의 펀드와 기업 간 대결의 끝은 결국 주총에서의 표 대결인데 인기투표 성격이 짙다. 기업이든 펀드든 나머지 주주를 설득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가 최종 승부를 가르기 마련"이라면서 "이사회 독립성을 높이고 운영 절차를 투명하게 하는 등 선진적 거버넌스를 구축하라고 시장이 주문하는 것도 결국은 기업으로 하여금 이 작업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자극한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기업 대응 전략 관련 김 파트너는 행동주의 펀드 접근 방식을 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접근에는 단계가 있다. 1단계는 이사회 참여 요구와 이사진 보수 체계 문제 제기, 2단계는 배당 및 자사주 소각 등 주주환원 확대 요구, 마지막 3단계는 사업 구조와 자본 배치 전반을 겨냥한 개편 요구다. 그는 "초기 단계에서 공격의 빌미를 줄이는 동시에 장기적인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사주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개정 상법은 자사주 취득 시 원칙적으로 이를 소각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만 신기술 도입이나 재무구조 개선 등 경영상 목적이 있는 경우 자사주를 활용할 수 있다고도 적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자사주를 M&A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기업도 등장하고 있다. 결국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가 상승보다 M&A를 통한 주가 상승이 더 낫다"는 점을 주주에 증명해야만 한다.
이 같은 변화는 내년 주총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전망이다. 올해가 기업 밸류업을 위한 포지셔닝 단계라면 내년은 실제 성과를 둘러싼 검증 국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파트너는 "지금까지는 주가를 낮게 유지해 주식 증여에 따르는 세 부담을 줄이는 유인이 있었다면 앞으로는 시장 변화에 따라 주가를 끌어올린 다음 이를 활용해 세 재원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