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주주총회 풍경이 바뀌고 있다. 대법원이 지난해 이사인 주주는 자신의 보수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판단을 확정하면서 오너가 주총장에서 직접 이사 보수한도 안건을 밀어붙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이 주총을 통과하지 못하면 정관에 구체적 금액이 명시돼 있지 않은 한 이사진에 보수를 지급할 근거가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사회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심혜섭 변호사(사진)는 이 이슈를 제기해 새로운 판례를 끌어낸 당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23년 남양유업 정기주총에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추천으로 감사로 선임된 그는 홍원식 당시 남양유업 회장이 주총에 참여해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한 사실을 문제 삼아 소송을 이끌었다.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 37기를 수료한 그는 법무법인 세종 등을 거쳐 개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 행동주의 변호사로 이름 알려…"변호사보다 투자자"
심 변호사는 자본시장에서 주주행동에 직접 관여하는 변호사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다. 과거 대형 로펌 재직 시 전문 영역을 살려 저평가 기업 중심으로 투자를 시작, 기업 측에 경영 개선을 요구하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4년 엘리엇이 삼성물산대상으로 주주행동 캠페인을 벌일 때 엘리엇 측 변호를 맡기도 했다. 지금은 스스로를 변호사보다 투자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남양유업과 만난 건 차파트너스를 통해서였다. 당시 차파트너스는 남양유업 지분을 매집해 공개적 행동주의 캠페인을 추진하던 상황이었다. 행동주의 펀드는 감사 후보 추천 카드를 보통 회사 측 협상 레버리지로 사용하곤 한다. 행동주의 펀드가 감사 후보를 주총에 올렸다는 건 회사와의 협상이 최종 결렬다는 신호에 가깝다. 차파트너스가 심 변호사를 감사로 내세운 행위는 주주행동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당시는 우리나라 자본시장에 주주 행동주의가 무르익던 시기였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SM엔터테인먼트 대상으로 주주행동을 한창 전개하고 있었고 남양유업에서도 감사 자리를 놓고 이사회 추천 인사와 주주 추천 인사가 서로 맞붙으면서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홍원식 당시 회장이 지분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분만 따지면 선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3%룰 적용으로 감사에 선임될 수 있었다.
다년간에 경험을 통해 저평가된 기업은 대부분 거버넌스 문제를 안고 있고 이를 조금씩 개선하면 기업 가치는 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 펀드 추천으로 감사가 됐다는 사실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심 변호사는 "주주 추천으로 감사가 됐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전문가들을 열심히 만났다"면서도 "남양유업 문제는 시장에 너무 노골적으로 비춰진 면이 있어 모른척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심혜섭 변호사는 최근 더벨과의 인터뷰에서 "법으로 모든 것을 규제하지 않으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지금의 시장 상황이 투자자 입장에선 비정상적"이라고 꼬집었다. [이미지=심혜섭 변호사 제공]
홍 당시 회장이 주총에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한 점이 대표적이다. 경영진 퇴직이 임박한 상황에서 결의가 유지될 경우 수백억원 규모 퇴직금이 발생할 수 있었다 홍 회장 측은 300억원 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 변호사는 홍 회장이 해당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 위법하다고 봤다. "학설과 판례를 통해 의결권 행사에 위법 요소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론상 무효 또는 취소가 확실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심 변호사는 "사외이사 3명으로 꾸려진 감사위원회에서도 주주추천 감사위원이 1명인 경우에도 그 감사위원이 위원회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내는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라면서 "감사로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온전히 홀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감사로 일하면서 어려웠던 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홍 회장 일가를 회사에서 마주쳤을 때 그들의 차가운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 잘못 인지하는 감수성 중요…"실질적 변화 기여고파"
감사의 역할은 경영진을 견제하는 데 있다. 경영진의 경영행태와 부정행위를 견제하고 법령과 정관 준수 여부를 감시해 이해관계자 권익을 보호한다. 행동주의를 전개하는 주주의 경우 이사 후보를 선임키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감사 선출 효과가 훨씬 클 수 있다. 최근 상법 개정으로 상장사 분리선임 감사위원 수가 기존 1명에서 현재 2명으로 늘었는데 이 정책이 감사위원의 실질적 독립성을 제고할 수 있을지 관건이다.
그렇다면 감사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심 변호사는 규범 준수를 강조한다. 심 변호사는 "우리나라에는 관련 법이 없으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제도가 바뀌면 기업은 그 취지를 따르기보다 우회 방법을 먼저 찾는다는 것. 심 변호사는 "법으로 모든 것을 규제하지 않으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지금의 시장 상황이 투자자 입장에선 비정상적"이라고 꼬집었다.
이번 주총만 봐도 대형 상장사가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없도록 상법이 바뀌니 각 기업들은 시차 이사제를 도입하고 이사 상한선을 변경하는 등 우회 방법을 찾는다. 자사주를 의무적으로 소각게 하는 개정 상법이 시행되자 예외 조항을 들어 자사주를 한 주도 소각하지 않겠다는 상장사도 적지 않다. 이해관계자는 결국 법원으로 이 문제를 들고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법원도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심 변호사는 "예를 들어 회사가 유상증자를 단행하거나 자사주를 소각할 때 경영상의 목적을 들어 그 결정을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법원은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경영상의 목적을 해석해 그 결정을 정당화시켜주는 측면이 있다"면서 "제대로 된 감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회사 경영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잘못된 점을 바로 짚어내고 이를 풀어나갈 수 있는 일종의 '감수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심 변호사는 코스닥 상장사 백금T&A 사외이사로 추천된 상태다. 백금T&A 최대주주 측이 심 변호사에게 기업 밸류업의 해결사 역할을 주문했다. 기업 오너라고 하면 행동주의 이력에 부정적 인식을 가질법도 한데 직접 심 변호사를 찾았을 정도로 그 의지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심 변호사는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