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의 역할에서 투표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회사 발전에 녹여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호바트 리 엡스타인 원익홀딩스 상근감사는 사외이사 권한에 대해 강조했다. 한국 거버넌스에서도 사외이사들의 권한이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엡스타인 감사는 한국과 미국의 주요 금융사 CEO를 거친 금융전문가다. 글로벌 수준의 거버넌스와 금융업 및 제조업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금융사와 반도체 회사 사외이사를 거쳐 현재 원익홀딩스 감사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경제도 거버넌스 선진화와 함께 이사회의 권한, 특히 사외이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회사도 사외이사를 동반자로 인식하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사외이사 역할 작지 않아, 기업도 전문성 강화 위해 노력”
엡스타인 감사는 중학생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뒤 서던캘리포니아대 학사, UCLA MBA 등을 취득했다. 메릴린치, 크레딧스위스 등에서 몸담은 뒤 골드만삭스 한국대표, 동양증권 부사장, KTB투자증권 대표 등을 지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기업 이사회에 몸담으면서 거버넌스 개선을 조언했다.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원익홀딩스의 사외이사를 오랫동안 지냈다. 올해 초 원익홀딩스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사임한 뒤 상근감사로 자리를 옮겼다.
사외이사에 중요한 덕목중 하나론 전문성을 꼽았다. 원익홀딩스의 경우 통상적으로 한 번 교육마다 3~4시간씩 반도체 강의를 제공한다. 엡스타인 감사는 "이것이 금융업계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것 같다"며 "다만 앞으로 제조업체들의 경우 사외이사로 해당 영역 전문가 출신을 더 섭외하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호바트 리 앱스타인 원익홀딩스 감사(본인 제공)
이사회의 권한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사외이사들이 기업과 따로 떨어진 외부자가 아니라 회사 경영과 발을 맞추는 파트너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 이사회의 사례도 소개했다. 사외이사진이 최고경영자 인사권을 쥐고 있을 정도로 이사회의 힘이 강하다는 것이다.
엡스타인 감사는 "제너럴일렉트릭(GE) 이사회가 CEO를 갈아치우는 데 1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며 “선진 자본시장이 될수록 이사회의 권한이 강해지는데 이사회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전반적으로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엡스타인 감사가 말한 사건은 GE 이사회가 2018년 10월1일 존 플래너리(John Flannery) 전 CEO를 경질한 일이다. 플래너리는 경영난에 빠진 GE의 구원투수로 2017년 8월 투입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무리한 변화만을 추진하면서 이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당시 플래너리는 2017년 GE의 배당금을 주당 24센트에서 12센트로 절반 줄였다. 주가 부진으로 2018년 6월 GE는 다우존스 지수에서 퇴출됐으며 설상가상으로 발전기 사업에서 제품 불량 등이 발생하면서 난국에 빠졌다. 장기간 부진하던 GE 주가는 플래너리가 경질된 당일 7.1% 상승마감했다.
플래너리의 후임 CEO는 래리 컬프(Larry Culp)가 됐다. 특이한 점은 래리 컬프는 2018년 4월 GE의 독립이사로 선임된 외부인 출신이라는 것이다. CEO 경질은 물론 후임 CEO 인선에서도 이사회의 권한이 드러난 사례라고 엡스타인 감사는 짚었다.
그는 "GE 역사상 최초로 내부자 출신이 아닌 CEO가 래리 컬프"라며 "그만큼 이사회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건"이라 말했다.
◇ “5조원 기준 합리적인지 재고해야”
금융산업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리스크 관리에도 사외이사들의 개입이 중요하다. 한국투자금융지주에서는 업권 전문가 출신 사외이사들과 경영진이 모여 리스크관리위원회를 강화한 것을 중요한 사례로 꼽았다. 엡스타인 감사는 “리스크관리위원회 기능이 잘 작동되면서 자금 집행에 있어 일정 규모 이상은 반드시 리스크관리위 의제로 올라오게 됐다"고 말했다.
선임사외이사나 각 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사외이사들도 효율적인 소통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선임사외이사나 위원장들은 오너 일가에 조언을 할 수 있는 경우가 통상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엡스타인 감사는 "이들은 경영진과 사외이사 사이 가교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데, 실제로 원익홀딩스 재직 시절 이사들의 의견을 오너측에 전달하여 회사 발전에 반영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거수기 논란에 대해선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도 이사회 안건은 만장일치가 표준이라는 것이다. 반대 의견은 대부분 사전 조율을 통해 해결된다. 반대하는 사외이사들을 사측이 미리 설득해 찬성 의견으로 돌려놓는 식이다. 엡스타인 감사는 “만장일치와 사외이사 독립성 침해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며 “미국에서도 경영 안정성을 위해 만장일치를 우선시한다”고 강조했다.
엡스타인 감사는 사외이사로서 겪을 수 있는 고충들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우선 지금의 공정거래법이 정하는 기준이 현 시대에 맞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가령 공시대상 기업집단 계열사의 사외이사가 자신의 사업체를 영위하는 경우, 해당 기업집단의 재무제표에 그 사업체를 포함시키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몇몇 사외이사가 이 때문에 자신의 사업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엡스타인 감사는 전했다.
그는 “약 10년 전에 만들어진 자산 규모 5조원 기준이 지금 시대에 적합한지 재고해야 한다"며 "이 때문에 불합리한 규제가 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