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기업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 왔다. IMF 이후 이뤄진 일련의 제도적 정비와 최근의 상법 개정은 이사회가 최대주주나 오너의 과도한 경영권 남용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형식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주력해왔다.
남혜정 동국대학교 교수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본다. 제도보다 제도를 실제 운용하는 사람에 주목하고 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식 기업 지배구조를 무작정 따라하기보다 한국 기업의 역사와 문화, 경제적 특성에 맞는 기업 지배구조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남 교수의 통찰은 현장 경험에서 비롯됐다. 동국대학교 회계학 교수인 그는 오랫동안 기업활동에 대해 학문적으로 분석했을 뿐 아니라 한국수출입은행 비상임이사,
롯데케미칼 선임 사외이사를 지내며 기업의 목소리를 직접 청취했다. 지금은
KB증권 사외이사로서 감사위원회 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사회 독립성, 제도보다 사람에 달렸다” 남 교수는 더벨과 인터뷰에서 “기업의 지배구조는 그 나라의 경제, 문화, 역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온 결과물이다"라며 "미국식 기업 지배구조가 정답이 아니라고 보며 한국기업의 R&D(연구개발) 투자비용이 상대적으로 많고 공격적 투자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오너 경영이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최근 상법 개정 기조가 다소 급진적일 수 있다고 바라본다. 미국식 기업 지배구조를 과도하게 지향하는 것은 또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처럼 단기 성과주의에 지나치게 매달려 투자가 위축되거나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외이사의 책임을 강화하는 시도 또한 취지는 좋지만 그만큼 이사회의 운영 효율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사 충실의무 확대로 유사 시 소송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의사결정을 기록하면서 비용이 든다”며 “이사회에서 허심탄회한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못하는 점도 운영상 비용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법적 제도 정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게 남 교수의 강조점이다. 사람들이 제도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제도가 자리를 잡기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회의 형식적 독립성에서 벗어나 실질적 독립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남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 관련 제도는 때로 급진적일 만큼 잘 갖춰져 있는데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면 제도 정착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손질한다"며 "이제는 제도가 아니라 실제 운용하는 사람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 교수가
롯데케미칼에서 선임 사외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외이사만의 회의를 개최한 게 대표적 사례다. 사실 선임 사외이사 제도나 사외이사만의 회의 개최를 강조하던 기조는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선임 사외이사로서 경영진을 제외한 사외이사만의 회의를 처음 도입한 것은 남 교수가 최초다. 관건은 형식적 절차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식으로 제도를 운용하느냐라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이사회의 진정한 독립성은 사외이사가 위축되지 않고 제역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에서 확보된다고 남 교수는 말했다. 투자자가 이사회 활동 공시를 꼼꼼하게 살피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외이사가 연임을 지나치게 의식해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기업 내부자의 태도와 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시각이다.
◇“성장 목표에 충실, 비재무정보까지 챙긴다” 남 교수의 사외이사로서 철학은 어떨까. 그는 “성장이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기업에 맞는 지배구조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민간기업은 공공기관과 달리 안건이 훨씬 다양하고 사외이사가 재량을 발휘할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현재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KB증권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 교수는
KB증권 이사회에서 상당한 중책을 맡고 있다.
KB증권 이사회는 총 9개의 소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남 교수는 이 중 5개에 소속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감사위원회와 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경우는 위원장을 맡고 있다.
남 교수는 올 5월
KB증권에 사외이사로 합류했는데 임기 초부터 상당히 바빴다. 지배구조법에 따라 올 초 설립된 내부통제위원회가 감사위원회와 역할 등이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다. 또
KB증권은 감사위원회 활동도 활발한 편이라서 해당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남 교수는 회의 안건을 검토하고 사전 조율하는 데 적잖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KB증권 이사회의 경쟁력도 체감했다. 그는 “금융이 규제산업이다보니 사안이 굉장히 많은데
KB증권은 아주 꼼꼼하게 준비할 뿐 아니라 피드백 속도도 매우 빠르다”며 “단순 보고 안건조차 이사진이 그냥 넘기지 않고 치열하게 오랜 기간 상의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남 교수는
KB증권 사외이사로서 비재무적 영역까지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비재무적 정보 공시가 임박했는데 여기에서 회계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기업의 이익만 따지는 시기가 지난 만큼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시장과 충실히 소통하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