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코스피 지수가 4000선을 돌파하며 '코리아 디스카운트' 벽이 무너졌다. 상법 개정을 필두로 인공지능(AI) 산업 성장, 한·미 관세 협상 타결과 마스가(MASGA) 프로젝트 가동 등 거시 경제 여건이 맞물린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도 시장 평가를 좌우하는 주요 이슈다. theBoard는 올해를 관통하는 10가지 지배구조 이슈를 선정했다.
시장에서 수차례 좌절됐던 상법 개정 시도가 올해 마침내 이뤄졌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주주로까지 확대한 1차 개정안을 시작으로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를 담은 2차 개정안까지 연이어 국회를 통과하면서 국내 기업 거버넌스의 기본 룰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평가다. 잇따른 대주주 중심 의사결정 논란과 주주 갈등이 촉매제가 된 이번 개정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감과 맞물려 기업 거버넌스 운영과 나아가 자본시장 전반까지 구조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논란의 상법 개정안 통과
시장에서 상법 개정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당시 법원은 법정관리 중이었던 기업을 차입매수 방식으로 인수하는 과정에서 주주 이익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자산 양도 행위가 일어났다면 이는 배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서 이사의 보호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2009년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배정 사건과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전 에버랜드) 합병 이슈 등을 거치면서는 최대주주의 일반주주 이익 편취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LG화학의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과 지난해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합병 시도, 같은 해 고려아연 유상증자 추진 과정, 올해 빙그레 지주사 전환 시도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규모 증자 시도 등을 둘러싸고도 최대주주가 일반주주 이익을 편취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고 시장에서는 상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오너 일가가 향후 증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주가를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 것도 주주 간 갈등을 격화시키는 요소가 됐다.
정치권에서는 시장 요구를 받아들여 입법 시도가 이어져왔다. 과거 21대 국회에서도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명시한 상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당시 재계 측 반발 등에 가로막혀 국회 통과가 무산된 바 있다. 지난해 초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이사회가 소액주주 이익을 고려토록 상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언급했고 이복현 당시 금융감독원장과 최상목 당시 경제부총리도 호응했다. 하지만 8개 경제단체가 반대하면서 또 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미지=국회 홈페이지]
올 상반기에도 민주당 이정문 국회의원 등이 해당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이 개정안이 실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당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재표결에 부쳐졌고 의결 정족수 부족으로 최종 부결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선 상법 개정이 거의 확실시된 것으로 인식돼 일부 기업들이 주주 권리를 의식해 기존에 추진해 온 합병 계획을 취소하는가 하면 지주체계 구축을 재검토하는 등 거버넌스 재편 작업에 제동이 걸리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뀐 건 지난 6월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상법 개정안 통과를 대통령 취임 후 2~3주 안에 신속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바 있어 기대를 모았다. 실제 민주당은 새 정부 출범 직후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개정안은 지난 7월 초 국회를 통과했다. 상법 개정안의 내용으로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확대 명문화 △독립이사 제도 도입 △사외이사 감사위원 선임시 최대주주 측 의결권 3% 제한 △전자 주주총회 의무화 등이 꼽힌다.
◇ 주식시장 고공행진에 주주 행동주의 촉발…이사회 역할 강조
변화는 계속 이어졌다. 민주당은 2차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이 법안은 지난 8월 말 국회를 통과했다. 2차 상법 개정안에는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사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하는 내용과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민주당은 자사주 취득 시 원칙적으로 이를 소각케 하는 내용을 담은 3차 상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 자본시장 관계자는 "올해 톱뉴스는 단연 상법 개정 성과"라면서 "기업 거버넌스 이정표로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상법 개정에 대한 효과는 컸다. 반도체와 방산 등 일부 시장 주요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미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움직임이 계속된 데 이어 상법 개정에 따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감이 힘을 보태면서 코스피 지수는 지난 10월 사상 처음 4000선을 돌파, 현재까지 상승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배당소득 분리과세 최고세율 인하 조치 등이 추가 현실화할 경우 국내 주식시장 열기는 당분간 더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주주 권리 강화 움직임에 맞춰 다양한 펀드들이 행동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한 점도 눈에 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태광산업 자사주 대상 EB 발행에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소송전을 벌였고 VIP자산운용은 롯데렌탈 상증자 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스틱인베스트먼트, 라이프자산운용은 BNK금융그룹에 행동주의를 전개하고 있다. 자사주 의무 소각을 명시한 3차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되기 전 자사주 처분 차원에서 EB 발행이 급증한 점도 눈에 띈다.
물론 지금의 상법 개정안이 완벽한 건 아니다. 법원은 트러스톤운용이 태광산업을 대상으로 신청한 EB 발행 가처분 소송 판결에서 상법 개정안 취지를 반영하지 않고 기존 판결을 답습하면서 시장에 논란을 일으켰다. 상법 상 유지청구권 행사 조건은 '회사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경우'에 한정돼 있어 주주가 손해를 입어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본 점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 취지를 완벽 달성하기 위해선 후속 법률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내년 상법 개정에 맞춰 이사회 운영 가이드라인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최근 민간 전문가 단체 한국거버넌스포럼이 이사회 운영 가이드라인을 공개한 데 이어 법무부 산하 ‘이사 행위규범 가이드라인 제정 태스크포스(TF)’도 관련 가이드라인을 선보였다. TF가 선보인 가이드라인에는 대주주와 소액주주 사이 이해 상충 소지가 있는 거래를 할 때 상장사는 특별위원회를 구성케 하는 내용이 담겼다. 특별위에는 자문을 구할 수 있고 전권까지 위임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