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0일 대규모 상장회사의 집중투표제 의무화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제도가 실제 작동할지는 미지수다. 시행 전부터 이사 수 상한을 신설하거나 줄이는 정관 변경안이 잇따라 통과됐고, 총회 전 의결권 행사 현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쪽은 여전히 경영진뿐이다. 개정 상법이 일반주주의 이사회 진입 기회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지만 주주총회 운영 기준과 정보 비대칭 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제도는 형식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구현주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
사진)는 최근 더벨과 만나 "공정한 주주총회 운영 기준이 확립되지 않으면 집중투표 의무화 규정은 충분한 효과를 내기 어렵다"며 "규칙을 아직 정하지 않은 채 경기가 시작된 셈"이라고 말했다.
구 변호사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관여 활동과 주주권 행사 사건을 가장 활발하게 수행해 온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다. 2018년 KCGI를 대리해
한진칼 분쟁에 관여한 것을 시작으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등 주요 행동주의 펀드의 캠페인을 다수 자문했다. 현재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영풍·MBK파트너스 컨소시엄 측을 대리하고 있다.
◇집중투표 의무화했지만…현장은 벌써 '우회' 고민

구 변호사는 집중투표 의무화가 곧바로 일반주주 추천 이사의 선임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일반주주가 후보를 발굴하고 의결권을 확보해 실제 이사회에 진입시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해서다. 올해 정기주주총회에서도 주주제안 후보가 이사회에 진입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제도 시행을 앞두고 이미 우회 장치도 등장했다. 그는 "2026년 정기주주총회에서는 사실상의 시차임기제 도입과 이사회 정원 축소 등 집중투표제를 우회할 수 있는 정관 변경안이 여러 회사에서 통과됐다"며 "선임할 이사의 수를 줄이는 안건을 먼저 결의하는 것만으로도 집중투표 효과는 크게 감소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가 2명 미만이면 집중투표는 실시할 수 없고, 정원을 줄이거나 임기를 흩어 놓는 방식으로 제도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가 가장 큰 문제로 꼽은 것은 정보 비대칭이다. 집중투표에서는 선임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이 부여되기 때문에 어느 후보에게 표를 집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상대 후보의 득표를 예측할 수 있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경영진은 전자투표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고 외국인 주주의 의결권 행사 내역도 총회 전에 전달받지만 일반주주는 동일한 정보를 전혀 알 수 없다. 구 변호사는 올해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를 대표 사례로 제시했다. 당시 집중투표를 통해 이사 5명이 선임됐는데 이사회가 추천한 후보 두 명의 득표 차이는 90표에 불과했다. 그는 "회사가 사전 표결 현황을 토대로 후보별 의결권을 배분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며 "표 대결이 첨예한 주주총회에서는 사전 표결 정보 접근 여부가 실제 선임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주주의 과소표결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꼽았다. 해외 의결권 행사 플랫폼 가운데 일부는 집중투표 기능을 지원하지 않아 주주 의사와 다른 방식으로 의결권이 행사되지만 이를 어떻게 보정할지에 대한 통일된 기준은 아직 없다. 실제로 2023년 이후 집중투표가 실시된
KT&G,
JB금융지주,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에서 과소표결의 처리 방식은 서로 달랐다.
구 변호사는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범위의 사전 의결권 행사 정보를 공개하도록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의무가 있느냐는 끝났다…이제는 위반했느냐가 쟁점
구 변호사는 이번 상법 개정의 가장 큰 변화로 '쟁점의 이동'을 꼽았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명시한 조항은 새로운 의무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도 인정됐어야 할 의무를 명문화한 확인적 입법이지만, 실무상 의미는 작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동안은 이사가 회사에 대해서만 의무를 부담한다는 논리로 일반주주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이제 법원은 이사가 주주에 대해 아무런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청구를 배척하기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어 "쟁점은 의무가 존재하는지 여부에서 실제 그 의무를 위반했는지 여부로 옮겨갔다"며 "소송 실무에서는 매우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개정 상법의 충실의무 조항이 처음 시험대에 오른 사례로는 지난해
태광산업의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EB) 발행을 꼽았다. 3200억원 규모의 EB 발행을 두고 이사의 충실의무 위반 여부가 정면으로 다퉈졌고, 법원은 9월 발행금지 가처분을 기각했지만
태광산업은 두 달 뒤 발행 계획을 철회했다.
변화는 상담 현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거래가 끝난 뒤 이사의 책임을 묻는 상담이 대부분이었다면 최근에는 합병이나 자사주 처분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충실의무 위반 가능성을 사전에 검토하는 자문이 크게 늘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 3%룰 확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기관투자자·행동주의 펀드의 문의도 지난해부터 늘었다.
재계가 요구하는 경영판단원칙 명문화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미 판례로 확립된 원칙을 조문화한다고 새로운 보호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해상충 거래에서는 별도의 기준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델라웨어 판례법리처럼 이사회의 독립성이 결여된 이해상충 거래에서는 주주가 이를 증명하면 경영판단원칙의 추정이 번복되고, 절차와 가격의 공정성을 이사 측이 증명해야 하는 완전공정성 심사가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면책 효과만 강조하는 방식은 현재 판례보다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독립성은 요건보다 구조…반대표가 늘어야 이사회도 바뀐다
독립이사 제도 역시 자격요건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현행 제도는 이해관계 여부를 중심으로 결격사유를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지까지는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립이사후보추천위원회 역시 기존 이사회가 구성하는 만큼 선임 구조 자체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요건은 충족하지만 독립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유형이 실무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다고 밝혔다. △지배주주·경영진과 학연이나 전직 직장으로 얽힌 인사 △회사에 자문을 제공해 온 로펌·회계법인 출신 △대관 역할이 기대되는 정부기관 출신 등이다.
구 변호사는 "실질적인 독립성은 누가 선임했는지, 실제 반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지에서 결정된다"며 "결격사유를 추가하는 것보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처럼 지배주주가 아닌 다른 주주도 선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주제안을 통해 선임된 이사가 이사회에서 고립되는 문제도 운영의 문제로 봤다. 그는 "문제가 있는 안건이 상정되지 않거나 상정 전에 수정되는 효과는 외부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며 "주주제안으로 선임된 이사 역시 특정 주주의 대리인이 아니라 회사와 전체 주주를 위한 이사라는 원칙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표가 드물다는 사실만으로 이사회가 제 기능을 못 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조율이 실제로 있었다면 수정 요구나 보류, 추가 자료 요청 같은 흔적이 의사록에 남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주주가 열람청구를 통해 이사회 의사록을 확인해도 그런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원안 그대로 만장일치가 반복된다면 충분한 심의가 이뤄졌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전체 주주가 충실의무
대상임이 명확해지면서 반대 의견과 이의 기재는 독립이사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앞으로 반대표와 이의 기재가 늘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사회가 실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