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 사외이사들의 자리 옮기기가 활발하게 관측됐다. 연임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사회를 옮기는 이사부터 기업 임원 등으로 스카웃되면서 주총 종료 며칠 뒤 이사직을 내려놓는 이사들도 있었다. 한 기업 사외이사가 사임하자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양한 기업의 이사들이 연쇄적으로 적을 옮기는 현상도 발견됐다. 시장에서는 후보 풀이 작은 것을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 특정 인물에 러브콜 집중, 이사 불명예 퇴진도
현재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조승아
현대제철 사외이사(
사진)는 그간 여러 기업에서 활동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애큐온캐피탈 사외이사로 일한 그는 2020년 삼성SDS 이사회에 합류했다. 첫 임기 3년을 소화한 조 사외이사는 2023년 재선임에 성공해 3년 임기를 추가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해 6월
KT 임시주총 신규 사외이사 후보에 올랐다. 2023년 말 그는
KT와 삼성SDS 등 두 기업 이사직을 겸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SDS 측에서
KT와 경쟁사 관계인 점을 들어 조 사외이사 측에 두 기업 이사 겸직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KT 측이 2023년 사외이사 자리를 제안했을 때 조 사외이사는 관련 법적 검토를 요구했으나 문제 없다는 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 사외이사는
KT와 삼성SDS 이사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조 사외이사는 2024년 삼성SDS를 떠나는 것으로 상황을 매듭지으려 했다.
조 사외이사가 사외이사 겸직 제한이 해소되자 이번에는
현대제철이 사외이사 오퍼를 제시했다. 조 사외이사는 이를 수락해 2024년
현대제철 사외이사로 합류했다. 그렇게
현대제철과
KT 두 기업 사외이사직을 2년여 간 겸직했다. 겸직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건 지난해 말이다. 현대차그룹이
KT의 최대주주가 된 것이 문제였다.
현대제철은 현대차 계열사다. 특정 회사 최대주주(법인) 이사는 그 회사 이사로 재직할 수 없다.
애시당초
KT 측 법률 검토 결과를 믿고 사외이사직을 수락했는데 별안간 불명예 퇴진을 앞두게 되자 조 사외이사는
KT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려고도 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주변 인사들 만류로 소송까진 이어지진 않았고
KT 이사회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짓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KT 측 법률 검토가 허술했다는 문제가 남아있지만 시장에선 사외이사 풀 자체가 크지 않은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상장사 사외이사는 "사외이사 풀을 교수나 변호사, 회계사 등으로 한정짓다보니 풀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불특정 다수의 기업들이 특정 인사에게 사외이사 오퍼를 제공하고 그 후보가 무분별하게 기업을 선정하다보면
KT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말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 "이사회 활동 부담 없는 곳으로 이동하려는 경향"
최근 주총 시즌 특정 사외이사를 향한 기업들의 러브콜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 결과 한 회사의 사외이사가 임기를 채우기 전 다른 기업 자리로 이동하면서 공석이 생겼고 그 자리를 타사 사외이사로 채우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짧은 시간 다양한 기업 이사들이 연쇄적으로 자리를 옮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사외이사 입장에선 더 나은 환경을 찾는 셈이지만 이사회를 운영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이사회에서는 현직 사외이사가 임원급 인사로 기용되면서 이사회에 공석을 만드는 경우들이 눈에 띄었다.
한화오션의 안완기 전 사외이사는
한화그룹 임원으로 기용되기로 하면서 불가피하게 해당 사외이사직을 내려놓았는데 그 자리에 나우IB 사외이사로 재직하던 김영삼 사외이사가 채용됐고 나우IB는 기존 이사 이탈에 따라 새 후보를 찾아 나선 결과 윤춘성 전
LX인터내셔널 대표가 이사회에 등판하게 됐다.
롯데렌탈 상황도 비슷했다. 4년여 간 사외이사로 활동해 온 유승원 사외이사가 지난 1월 일신상의 사유를 들어 돌연 사임하자
롯데렌탈은 새 후보 물색에 나섰다. 레이더망에 잡힌 건 전규안 에이블씨앤씨 사외이사였다. 전 사외이사는 지난달 25일 임기 만료를 일주일여 남겨놓고 이사직을 사임했다.
롯데렌탈은 그 다음날 주총을 열고 전 후보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그는
영원무역과
롯데렌탈 이사직을 겸직하고 있다.
임기 만료를 2년여 앞두고
롯데렌탈을 떠난 유 전 사외이사 이름이 발견된 곳은
진에어 주총에서였다. 유 전 사외이사는
진에어 신규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됐다. 그의 행보를 두고 시장에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사회 활동을 더 무난하게 전개할 수 있는 기업을 선택한 것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시장 관계자는 "상법 개정으로 활동 부담이 없으면서 비슷한 조건을 찾으려는 경향이 세졌다"고 말했다.
이 밖에 박영석
HK이노엔 사외이사는 지난달 말 임기를 시작한 뒤 불과 며칠만에 일신상 사유를 들어 자진 사임했고
NH투자증권 송규정 전 사외이사는
KT 법무실장으로 기용되면서 정기주총 종료 며칠 뒤 이사회를 떠나기로 했다. 지난해 말 조승아 사외이사 사태에 이어 대표이사가 바뀌면서 법무실장을 새로 선임했다는 게
KT 측 설명이지만 일각에서는 이사회 이해도가 높은 후보를 찾은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