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이 정기주주총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원래 보통결의 사항에 불과한 안건이지만 이사인 주주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되면서 사실상 통과 불능 안건으로 변질됐다. 앞으로 임시주총을 새로 개최한다고 하더라도 일반주주 주총 참여율이 낮은 한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사회 운영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이 사태는 지난해부터 시장에서 예견되어 왔다. 대법원이 이사인 주주가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셀프 보수 인상' 시도에 다름 없다고 판단하면서 최대주주의 의결권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코스닥 시장 곳곳에서는 해당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주주인 이사가 이사직을 내려놔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 측에 제도 개편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제기되고 있다.
◇ 이사 보수총액 한도 미결…일반주주 참여 사실상 전무 코스닥 상장사 일신바이오 이사회는 지난 27일 오전 정기주총을 개최하고 △재무제표 승인 안건과 △임원 보수총액 한도 승인 안건 △정관 일부 변경 안건 등을 상정했다. 주총에서는 임원 보수총액 승인 안건을 제외한 나머지 안건이 원안 그대로 통과됐다. 이사 보수총액 한도 승인 안건은 정족수 미달로 주총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일신바이오가 주총에서 이 안건을 통과시키지 못한 것은 2007년 상장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사 보수총액 승인 안건이 주총 문턱을 넘기 쉽지 않다는 건 어느정도 예견된 바 있다. 지난해 대법원은 이사인 주주가 주총에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자기 보수 한도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다름 없다고 보고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최대주주가 등기이사로 재직하면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 통과를 주도했던 상장사는 불특정 주주들에게 안건 통과를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회사가 이사 보수한도를 설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정관에 특정 금액을 적시하는 방법과 매년 주총에서 새롭게 보수한도를 승인받는 방법이다. 회사의 실적은 매년 바뀐다. 대부분 회사는 이사 보수를 실적과 연동시키고 있기 때문에 매년 보수한도를 새롭게 설정해 승인받는 쪽을 선택하곤 한다.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은 상법 상 보통결의 사항이다. 전체 발행주식 4분의 1 찬성과 출석주식 과반 찬성이 동시에 필요하다.
일신바이오의 최대주주는 지난해 말 지분 29.6%를 가진 홍성대 대표다. 홍 대표의 형제와 자녀, 회사 임직원이 보유한 지분을 합치면 30.9% 수준으로 올라간다. 홍 대표 측 지분만으로 특별결의 사항을 통과시킬 순 없지만 홍 대표 측 의결권 행사가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안건 통과가 사실상 어려운 구조다. 지난 27일 주총에서는 홍 대표 측 이외 주주 참석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정족수 자체가 미달되는 사태로 이어지게 됐다.
이에 따라 일신바이오 이사진은 보수를 지급받을 수 없게 됐다. 이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현재 일신바이오 이사회는 홍 대표를 비롯해 홍 대표의 아들 홍중기 이사, 김재용 이사, 조용태 사외이사 등 4명의 이사로 구성돼 있다. 일산바이오 관계자는 "현재 회사 내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면서 "임시주총을 열어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 "위임장 확보에 총력 기해야"…일각서 제도개편 목소리 문제는 향후 임시주총을 개최해도 일반 주주 참여가 전제되지 않는 한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이사 보수한도 관련 안건을 주총에서 다룰 때 전체 발행주식에서 이사인 주주의 주식을 제외한 뒤 그 나머지 주식에 대해 정족수를 산정하도록 했다. 일신바이오와 같이 이사인 주주를 제외하면 주총 출석 주주가 거의 전무한 경우 주주 주총 참석률을 높이지 않는 한 딱히 방법이 없는 셈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사인 주주 의결권을 의결권을 배제한 뒤에라도 특별결의 정족수를 채우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 허다하다"면서 "위임장을 확보하기 위해 대행사를 활용하는 방법과 서면투표와 전자투표 등을 적극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특별 이해관계를 해소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주인 이사의 의결권이 정 필요하다면 이사직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코스닥 시장에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 미결 사례가 계속 나오는 건 주총 참여 방식이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상법 개정으로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대규모 상장사는 전자투표제 도입을 정관에서 배제할 수 없게 했지만 자산 2조원 미만의 중견·소형 상장사의 경우 딱히 제한이 없다. 일신바이오를 포함한 상당수 코스닥 상장사는 여지껏 전자투표제를 도입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일부 코스닥 상장사는 다양한 변칙 수단을 마련하곤 한다. 이사 보수한도 총액을 승인하기보다 개별 이사 보수를 정하는 식이다. 이 경우 해당 이사 외 주주인 이사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 블루콤의 경우 최대주주 1인에게 지배력이 집중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으로 이사 보수 관련 안건을 모두 통과시켰다. 정관에 보수 규정 준수 조항을 삽입하고 규정 변경(보통결의)을 통해 이사 보수를 책정하려는 곳도 있다.
현재까지 코스닥 시장에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 안건이 미결된 기업은 일신바이오 외에도 에이텍, 보성파워텍, 메디앙스, 마음AI 등이다. 대부분 일신바이오와 같이 그간 주주인 이사 주도로 관련 안건을 통과시켜온 곳이다. 이달 말까지 정기주총이 계속 이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더 추가될 수 있다. 코스닥 시장 관계자는 "최대 20여곳 상장사에서 이사 보수 관련 안건 미결 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제도 개편에 대한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코스닥 협회 관계자는 "일반주주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해결책이 없는 상태"라면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례를 모아 협회 차원에서 제도 개편에 대한 문의를 타진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가 확정한 내용을 실무에 적용하고 있는 단계라 대대적 보완 입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