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교수는 회계학의 관점에서 기업 지배구조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기업 지배구조가 재계의 화두로 떠오를 때부터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기업을 살펴봤다. 이화여자대학교 회계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25년간의 학술활동과 120편이 넘는 논문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도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동시에 이 교수는 실무도 병행해왔다. 한국투자금융지주와 한국투자증권에서 오랜 기간 사외이사로 근무하다 지금은 메리츠증권과
LG생활건강 이사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교수가 회계학 기반의 통찰력과 기업 이사회에 대한 실무적 이해를 모두 갖춘 거버넌스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메리츠증권은 최근 금융감독원의 권유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기로 했다. 사외이사가 이사회의장을 맡도록 했는데 그 첫 책무가 이상철 교수에게 주어졌다. 그는 책임이 무겁다면서도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활용해 전문 경영인과 협업하는 모델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메리츠증권 이사회 의장으로, '역할 확대' 이상철 교수는 지난 1일 메리츠증권 이사회 의장에 선임됐다. 메리츠증권이 사외이사 가운데 의장을 선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를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 교수는 이사회 의장이 된 뒤 처음으로 더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의장은 “최고경영자(CEO)가 이사회 의장을 맡으면 감시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감시의 주체가 되는 구조가 돼 독단적 경영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 당국의 판단”이라며 “최근 금융권에 적용되는 책무구조도의 정착 또한 CEO와 의장의 분리를 이끄는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의장은 책임이 무겁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의 의무가 갈수록 커지는 규제 상황에서 대형 증권사를 이끄는 위치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님을 실감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장은 "이사회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합의하는 생산적인 이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적극적 소통'은 메리츠증권 이사회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의장은 "메리츠증권 이사회는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질의하며 실질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며 "전문성이 뛰어난 경영진과 진솔하게 의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장은 이런 소통문화가 증권업의 특성과 잘 맞다고 바라봤다. 그는 "증권업은 다이나믹한 판단이 수시로 이뤄저야 하기에 경영진과 이사회 간 긴밀한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전문성 중심의 생산적 이사회 필요 이 의장이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이사회를 견제기능만 담보하는 장치로 바라보지 않아서다. 이사회야 말로 전문성이 발휘되는 논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사외이사가 경영진과 협업해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는 '전문성 기반 이사회'를 구성해야만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제까지 한국 사회는 이사회의 독립성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며 "그러나 이제는 사외이사가 전문성을 발휘해 최고경영자(CEO)와 머리를 맞대는 협력모델을 만들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의장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이사회의 독립성을 주로 강조했던 것은 지정학적 요인 때문이다. 그는 “한국 기업은 자원을 수입해서 가공하고 재판매하는 구조라서 밸류체인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며 “구조적 사유로 발생하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자본시장에서 리스크로 간주됐고 자금 조달 비용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사업구조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뒤섞이면서 기업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자연스럽게 외부 감시 기능이 우선시됐다. 사외이사의 독립성은 이를 위한 구조적 해결책으로 간주됐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도 이러한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가 경영진을 견제하기만 해서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사회의 생산성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과제다. 이 의장은 “사외이사는 주주를 대신해 경영진을 감시하는 동시에 이사회 일원으로서 기업을 함께 발전시킬 책무가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이 의장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의장은 “기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이론까지 접목할 수 있는 사람이 사외이사에 적합하다”며 “CEO 출신 등 양질의 인력이 이사진에 합류하는 사례가 늘어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체계 개편 없이 전문성 확보 어렵다” 실력 있는 인재를 영입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그에 걸맞는 유인이 있어야 한다. 이 의장이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보수체계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 의장은 “대부분의 사외이사 보수는 정액으로 지급된다”며 “앞으로 책임이 더 늘어나는 데 반해 경제적 인센티브가 적다면 실력있는 전문가가 사외이사를 맡을 유인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사외이사 보수 책정 이슈는 단순한 비용 논의를 넘어 인재 수급과 직결된 문제라는 주장이다. 예컨대 기업이 글로벌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영입할 때 그렇다. 정액제로 보수를 지급하는 국내와 달리 외국에서는 성과와 주식을 보수와 연동하는 방식이 보편적이다. 지금 같은 획일적 보수체계로는 글로벌 인재를 유치하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 의장은 “성과와 연동해 보수를 지급한다면 사외이사 스스로가 경영진 감시 기능을 능동적으로 수행할 것”이라며 “주식과 연동해 보수체계를 구성한다면 사외이사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일치해 대리인 비용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인 비용은 기업 경영진이 주주 이익과 반대로 사적 이익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손실을 의미한다
주식과 연동한 보상체계로는 스톡옵션과 RSU가(양도제한조건부주식) 대표적이다. 스톡옵션은 미리 정해진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보상체계다. 기업 주가가 오르면 차익을 얻을 수 있어 성과에 대한 직접적 보상이 이뤄진다. RSU는 근속이나 성과 등 특정 조건을 달성하면 실제 주식으로 전환되는 보상 수단이다.
이 의장은 “사외이사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만큼이나 이들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그에 걸맞는 지원시스템을 갖추고 사외이사의 역할에 맞춰 보수체계를 마련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실질적 인센티브 구조가 병행돼야 이사회의 전문성과 생산성이 제고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