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차로의 전환은 직면과제다. 다만 기업마다 같은 목표점에 도달하는 속도와 전략은 다르다. 경영진이 틀을 짠다면 마지막 이정표는 이사회의 몫이다. 이사회 구조의 차이는 논의 과정을 달라지게 하고 그만큼 전략도 상이해질 수밖에 없다. 이원 이사회제의 독일 폭스바겐·BMW와 단일 이사회제의
현대차그룹도 마찬가지다.
폭스바겐과 BMW의 공통점은 강력한 감독이사회의 존재다. 폭스바겐의 감독이사회는 '테슬라에 뒤처진다'는 지적에 CEO를 교체할 만큼 견제력이 강하다. BMW도 구조는 같지만 속도는 조절하고 있다. BMW 출신과 자동차 전문가들이 이사회에 포진한 만큼 미래차 전환에도 브랜드 가치를 우선한다.
현대차는 빠르다. 오너 경영과 신뢰받는 전문 경영진의 조합 속에서 미래차 전략은 빠르게 이사회 문턱을 넘어 실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에 뒤처진다' 비판에 CEO 갈아끼운 폭스바겐 이사회 폭스바겐의 이사회는 법적 권한과 실질 영향력을 모두 갖췄다. 견제 역할을 하는 감독이사회(Aufsichtsrat)의 영향력이 특히 강하다. 감독이사회에 지배주주인 피에히·포르쉐 가문이 포함돼 있어서다.
집행이사회(Vorstand)의 판단보다 감독이사회의 결정이 우위에 서고 필요할 때는 강경한 조치도 가능하다.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더라도 과감하게 이사회 구성원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 폭스바겐의 스타일이다. '테슬라에 뒤쳐진다'는 이유 등으로 CEO를 갈아치울 만큼 힘이 세다.

대표적인 사례가 헤르베르트 디스(Herbert Diess) 전 CEO 경질이다. 2022년 감독이사회가 표결을 통해 디스 전 CEO를 해임하고 후임 올리버 블루메(Oliver Blume·
사진)를 선임했다. 디스 전 CEO가 주도한 폭스바겐그룹의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CARIAD)는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경영진이 전면 교체되기도 했다.
감독이사회는 카리아드가 배정된 예산을 초과해 사용하고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고 봤다. 때문에 포르쉐 e-마칸 등의 신차 작업이 늦어졌다고 지적했다. 포괄적인 원인은 디스 전 CEO의 의사소통 부재 때문이라는 판단이었다.
디젤게이트 이후 전략 전환도 이사회가 주도했다. 주요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사회 의장인 한스 디터 푀치(Hans Dieter Pötsch)의 말을 인용한다. 미래기술 투자인 '플래닝 라운드 70'과 포르쉐의 기업공개(IPO) 과정 등에서 감독이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완전히 경영성과에만 집중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노동이사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생산성도 이사회에서 논의하는 안건 중 하나다. 독일의 매니저 매거진에 따르면 감독위원회는 지난해 말 드레스덴 공장 생산 중단, 오스나브뤼크 공장의 매각 등을 논의했다.
이사회 사이 의견이 갈려 팽팽한 논의가 이어졌다. 오너 가문은 더 강한 삭감 정책을 취하고 싶어했지만 반대 입장에 선 이사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노조 측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궁극의 드라이브 머신' 정체성 고심한 BMW 이사회 BMW 이사회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꼼꼼함'이다. BMW 이사회는 내부 승진자와 산업 전문가를 중점적으로 이사회 멤버로 기용해 뒀다. 감독이사회가 BMW의 브랜드 가치와 기술력, 미래차 전환까지를 아우르는 전문성을 지녔다는 의미다.
노이어 클라쎄 프로젝트를 주도한 건 올리버 집세 CEO다.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임명됐다. 폭스바겐그룹과 마찬가지로 CEO 변화를 통해 미래차 전환을 꾀했지만 과정이 평화로웠다. 하랄드 크루거(Harald Krueger) 전 CEO는 스스로 퇴임 결정을 내렸는데 사전에 이사회와 충분한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올리버 집세 CEO는 중장기적인 전동화 전략을 공개했다. BMW는 2010년대 초반부터 전기차 프로젝트인 i시리즈를 시작했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 중 빠른 출발이었지만 지금도 BMW는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전기차를 병행하는 다중 전략을 쓴다.
최근 10년간 BMW의 이사회를 이끌어오다 올해 5월 퇴임한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Norbert Reithofer) 전 의장은 인터뷰에서 다중 전략 배경을 설명했다. 내연기관차의 수익으로 전기차 전환을 뒷받침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완성차 기업 대비 전기차 전환 속도를 조절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경영진과 감독이사회 사이 브랜드 가치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BMW의 오랜 슬로건은 '궁극의 드라이빙 머신(The Ultimate Driving Machine)'. 정밀한 주행 성능과 운전자 중심 디자인·감성을 집약한 문구다. BMW는 조용한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다운 감성을 자극하지 못한다고 보고 작곡가와 협업해 드라이빙 사운드를 탑재할 만큼 브랜드 경험에 집착한다.
요약하면 프리미엄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미래차 체제로 연착륙하는 전략을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경영진과 BMW 출신 인물들이 포진한 감독이사회가 브랜드 가치를 중심으로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강력한 리더십과 빠른 의결' 퍼스트 무버 현대차 현대차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사회 의장을 겸한다. 정 회장이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호세 무뇨스 사장이 글로벌 전략을 진두지휘한다.
정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호세 무뇨스 사장의 전문성 아래
현대차 이사회는 경영진 제안에 큰 이견을 보이지 않고 합의하는 양상을 보인다. 정몽구 명예회장 시절부터 굳어진 모습이다. 정 명예회장은 1999년 이사회 의장에 오른 뒤 정 회장에게 이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약 21년간 의장 역할을 수행했다.
이사회의 신속한 결정은 단순히 강한 오너십에 기반하지 않는다. 경영진이
현대차의 미래에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기반이 된다. 정 회장 스스로가 자동차 산업에 천착해온 전문가고 경영진도
현대차그룹에 걸맞은 스페셜리스트로 꾸렸다. 사외이사들도 충분한 검증 능력을 갖췄다.
그만큼 미래차로의 전환 결정과 그 진행 속도도 빠른 편이다.
현대차그룹의 EV 전환은 정 회장이 회장에 취임한 2020년부터 본격화됐다.
조단위 투자를 선제적으로 단행한 끝에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프리미엄 완성차 등을 토대로 글로벌 톱3 안에 들었다. 바탕에는 투자를 빠르게 승인한 이사회의 기민함이 있다. 배터리 생산 합작에 대한 승인도 병행하면서 밸류체인을 구축하게 됐다.
리스크 대처 능력도 그만큼 뛰어나다는 평가다. 수출 중심의 글로벌 기업 특성상 외부 리스크가 상존하는데 경영판단과 이사회의 결정이 빠르게 완료될 수 있다. 2023년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조지아주에
현대차그룹과
SK온의 합작법인 설립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