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약품 이사회가 영입한 채이배 사외이사(사진)가 사외이사직을 사임했다. 상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이사 충실의무 확대를 적극 주장했던 거버넌스 전문가가 공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사회를 떠나게 됐다. 임기 시작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의 중도 사임이다 이는 현행 법상 공직과 영리법인 이사직을 겸직할 수 없다는 조항 때문이다.
한미약품은 채 이사의 이탈에도 법적 사외이사 요건은 충족하고 있어 당장 후임을 선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미약품은 지난 10일 채이배 이사가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한다고 공시했다. 지난 4월 말 사외이사 임기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채 전 의원은 최근 한성숙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현행법상 공직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법인의 임원직을 겸할 수 없어 이사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한미약품 입장에서도 공직 진출에 따른 불가피한 중도 사임인 만큼 이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 전 사외이사가 첫 상장사 이사회 활동을 시작한 곳은
한미약품이었다. 회계·재무 및 거버넌스 전문가로 합류한 그는 경영활동과 공공정책 전반에 폭넓은 경험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한미약품 사외이사로 선임된 건 지난 3월 말이지만 2023년까지 경기도 산하 공공기관인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를 지낸 만큼 공직자윤리법상 취업심사를 거쳤고 심사가 마무리된 지난 4월 이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회계사 출신의 채 전 사외이사는 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에 이어 이로움재단 상임이사(기후재정포럼 책임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한 바 있다. 지난해 상법 개정 관련 논의 과정에서 이사 충실의무 범위 확대 등을 적극 지지하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난 3월 말
태광산업 정기주총에서 행동주의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 트러스톤자산운용 측 사외이사 후보로 선임되기도 했다.

채 전 사외이사 사임으로 당장 후임 이사를 선임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지난해 말 기준 자산 1조4647억원의
한미약품은 이사회 구성원의 4분의 1을 사외이사로 채우면 된다. 채 전 사외이사 사임 전후로
한미약품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은 40%에서 33%로 낮아졌다. 자산 2조원 미만의 상장사는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중을 3분의 1로 채우면 되기 때문에 당장 사외이사를 추가 선임할 필요는 없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제약 산업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전직 사외이사가 좋은 자리로 이동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라면서 "지난 10일 관련 공시가 나왔으니 현재 후임 사외이사 선임 절차를 소개하기엔 이르다"라고 말했다.
한미사이언스 등이 지분 절반(50.4%)을 갖고 있는
한미약품은 별도의 이사회 사무국 조직을 두지 않고 재경팀에서 이사회 운영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현직 사외이사가 공직을 맡으면서 사임한 경우는 꾸준히 관측돼 왔다. 최근에는 한찬식
풀무원·
HD현대일렉트릭 사외이사가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선임되면서 몸담았던 두 이사회를 떠났다. 지난 5월에는
SK디스커버리 김진일 사외이사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으로 취임하면서 이사직을 내려놨다. 지난해 새 정부 출범 직후
삼성생명 구윤철 사외이사는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이사회를 떠났다.
각종 이익단체에 합류하면서 이사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이동철
JB금융지주 사외이사는 여신금융협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외이사 커리어를 중단했다. 협회장 지위에서 이해관계 충돌을 우려한 행보로 풀이된다. 지난해 말 금융투자협회 협회장 선거에서는 당시
OCI·
에스엘 등 두 상장사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던 이현승 LHS자산운용 회장이 출마하면서 시장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주총에서 임기를 보장받은 사외이사가 정관계 및 협회 활동 등으로 임기를 마치지 않고 이사회를 중도 이탈하는 데 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사외이사 자리를 사실상 경력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징검다리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 입장에서는 현직 사외이사가 임기 도중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이사회 전체 논의 연속성을 저해해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사외이사의 이동을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 구성을 단순히 비용 차원에서 고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시각"이라면서도 "기업 이사회가 신임 후보를 찾는 데 투입한 재원과 주주 표결이 이뤄진 점, 그리고 이사가 맡고 있는 중책 등을 감안하면 중도 이탈은 반갑지 않은 이슈일 것 같지만 네트워크를 확장한다는 측면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전 사외이사 사임이
한미약품 이사회 운영에는 당장 영향을 주지 않지만 모회사인
한미사이언스를 둘러싼 지배구조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룹 창업주 고 임성기 회장 차남 임종훈 한미정밀화학 대표가 그의 모친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누나 임주현 부회장 측에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매도해 힘을 합쳤고 이에 따라 신동균 한양정밀 회장이 장남 임종윤 코리그룹 회장 측 지분을 사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