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자자의 독립이사 후보 추천 문턱이 낮아질 수 있을까. 금융당국은 독립이사 후보 추천을 경영참여가 아닌 일반적인 주주권 행사로 인정해 관련 권리 행사를 활성화한다는 내용의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도 변경이 현실화할 경우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의 이사회 견제 기능이 강화되는 반면 기업 입장에서는 독립이사 후보 추천과 주주제안이 늘어나 이사회 부담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29일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지난 21일 금융지주 지배구조 TF를 개최하고 스튜어드십코드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국민연금의 금융지주 독립이사 후보 추천을 활성화하는 방안 관련 기관투자자가 독립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행위를 일반 주주권리 행사로 해석하는 내용 등이 거론됐다. 이 경우 기관투자자는 경영권 영향 목적 투자자로 변경 신고하지 않고도 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는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경우 주식 보유 목적이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임을 밝히지 않는 한 독립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데 상당한 제약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기관투자자들은 투자기업 거버넌스를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주권 행사에 적극 나서기 어려웠다. 시장에서는 이 규제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취지를 제한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행 자본시장법 147조 제1항과 같은법 시행령 제141조는 합의나 계약에 따라 의결권을 공동 행사할 것을 합의한 자를 공동보유자로 규정하고 있다. 공동보유자로 묶여 지분 합산이 5%를 초과할 경우 대량보유보고 의무가 발생한다. 이른바 '5% 룰'이다.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게 된 경우 이 내용을 신규 신고해야 하고 이후 1% 이상 변동하게 될 경우 변동 보고를 해야 하며 보유 목적도 구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현행 자본시장법 상 지분 보유 목적은 경영권 영향 목적과 일반투자, 단순투자 등으로 나뉜다. 공동보유자가 해당 기업에 독립이사 후보를 추천하기 위해선 경영권 영향 목적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사회 경영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투자나 단순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보유한 채 독립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경우 자칫 현행법 위반 소지에 휘말려 주총에서 의결권 행사가 상당 부분 제한될 수 있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문제는 자본시장법 상 공동보유자 해석 여지가 넓다는 점이다. 복수의 기관투자자가 주총 안건이나 지배구조 개선 방안에 단순 의견을 교환하는 행위도 공동보유자가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경영권 장악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안을 논의한 것만으로 규제망에 포섭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기관투자자의 주주 권리가 상당부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지분 보유 목적을 경영권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라라고 밝히는 것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기업과의 관계가 경색되거나 자칫 적대적 주주활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다양한 기관투자자들이 경영권 영향 목적으로 지분을 갖고 있다고 신고하는 것 자체를 꺼려한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당국은 관련 법 체계에 대한 유권해석을 새롭게 제시해 시장 오해 소지를 줄이겠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유권해석이 이뤄질 경우 기관투자자의 주주활동은 한층 활발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경영권 영향 목적 투자자로 분류될 가능성을 우려해 독립이사 후보 추천을 자제했던 기관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일부 행동주의 펀드는 경영참여 계획 공개에 따른 여러가지 부담을 피하기 위해 보유 지분을 일부러 5% 미만 수준으로 조정하고 독립이사 추천을 제한한 사례도 있었다.
반면 이사회 입장에서는 부담이 한층 가중될 전망이다. 기관투자자의 독립이사 후보 추천이 늘어나면 주주제안 요건을 충족한 안건을 이사회가 주총 안건으로 상정해야 하는 사례가 증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후보 추천이 선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회가 대응해야 하는 제안 자체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주총에서 이사 선임을 둘러싼 표대결 가능성을 상시 염두에 둬야 한다는 의미다.
시장에서는 이번 유권해석이 개인주주 플랫폼을 통한 주주권 행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최근 소액주주들이 플랫폼을 통해 의결권을 결집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만큼 기관투자자의 독립이사 후보 추천 문턱이 낮아질 경우 개인주주 의결권 집합에도 일정 절차를 거치면 이사 추천 문턱을 낮추는 방안이 함께 소개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법조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에 독립이사 추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현행 제도를 검토하면서 기관투자자 이사회 참여 문턱을 낮추게 되는 단계로 이어진 것"이라면서 "절차만 충족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독립이사 후보 추천 안건을 주총에 기계적으로 올려야 하기 때문에 이사회 입장에선 부담이 커지게 되지만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이 조치를 통해 기업 거버넌스가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