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감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사후 통제형 거버넌스에서 벗어나 인사위원회를 축으로 사전 전략형 의사결정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상법 개정 영향으로 주주 행동주의가 확산하고 그에 따라 주식 인센티브 정책 확대 등으로 이사회 내 인사·보상 역할 중요성이 커졌다. 글로벌 시장에선 보편화한 이 흐름이 비로소 우리나라 시장에도 본격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SK에코플랜트의 이미라 사외이사(
사진)는 인사 정책 전문가로 이사회의 인사위 역할 강화를 꾸준히 강조해온 인물이다. 최근 theBoard와 만난 이 사외이사는 "감사위가 리스크의 하방을 막는 데 주력한다면 인사위는 기업의 상방을 여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SC제일은행과 도이치뱅크 본사, 한국맥쿼리그룹, GE코리아 등을 두루 거친 이 사외이사는 한국타이어 사외이사를 거쳐 2022년
SK에코플랜트 이사회에 합류했다.
최근 인사위 역할이 커진 것은 글로벌 거버넌스 구조 변화 영향이 크다. 2001년 미국 엔론(Enron)사 회계 스캔들 이후 이사회 감사 기능이 대폭 강화됐다면 최근에는 '누가 회사를 이끌 것인가'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의 보상 문제가 국내외 이목을 끌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상장사 이사회의 핵심 역할은 감사와 보상, 인사 등 3개 요소로 추려낼 수 있다.
그간 우리나라 이사회는 감사위 역할이 강조돼 왔다. 인사·보상 이슈의 경우 이사회보다는 경영진이 주도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하지만 지난해 이후 상법이 연이어 개정되고 주주 권리가 강화되면서 기업 인센티브 제도가 다변화하기 시작했고 최근 주총 시즌 임원 선임과 평가, 보상 과정의 투명성을 확립하는 것이 이사회 화두로 떠올랐다. 이사회가 인사·보상 정책에 얼마나 관여할 수 있는지 시장 의견은 분분했다.
이 사외이사는 "감사위가 과거와 현재의 리스크를 관리한다면 인사위는 미래 10년을 좌우할 리더십과 보상 구조를 설계한다"면서 "기업의 전략을 진지하게 논하기 위해서는 이사회가 인사 정책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사외이사가 소속돼 있는
SK에코플랜트의 경우 인사위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 비상장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사회 산하에 회사 인사·보수 정책을 총괄하는 인사위를 운영하고 있다.
인사위 운영의 실
효성은 논의의 깊이에서 갈린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글로벌 기업 대부분은 사전 브리핑과 비공식 세션, 심층 토론 등의 과정을 거쳐 기업 인사 관련 사안을 장기간 논의한다. CEO 승계 정책을 마련할 때 경영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상황에 맞는 역량을 갖춘 후보를 찾는 게 대표적이다. 어떤 CEO를 선임하느냐에 따라 기업 색깔이 바뀌는 것은 물론 나아가 시장 생존 여부가 갈릴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매년 가을께 전 계열사 이사진을 소집해 정기 회의체를 운영하면서 그룹 차원의 정책을 세우고 이사 간 교류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SK그룹만의 분명한 강점이다. 더 나은 이사회를 구축하려는 그룹의 노력은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 사외이사는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서 비용을 줄이거나 긴축 조치를 취해야 할 때라도 그 결정이 조직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장기적으로 인재 관리와 조직 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보는 것이 이사회 역할"이라면서 "회사라는 배의 선장을 맡은 이가 CEO라면 이사회는 일종의 네비게이터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보상 정책도 방향성 제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주식으로 보상을 지급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주식 인센티브 도입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반응은 제각각이다. 주주와 이해관계를 일치시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단기 목표에 치중케 한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중요한 건 방향성이다. 인사·보상 정책을 서로 유기적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든지 형식적 기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SK에코플랜트는 임직원을 비롯해 이사진에게도 주식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 이 사외이사는 그만큼 주주와의 이해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사외이사는 "인사 정책에선 개인과 조직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 성장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특정 정책 그 자체의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 정책을 통해 기업이 성취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읽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다양한 인사들이 이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그간 교수와 변호사, 관료 출신 등 특정 분야 인사들이 이사회에 진출했는데 앞으로는 경영 경험이 있는 이를 더 많이 기용해야 한다는 것. 이 사외이사는 "이사회 다양성은 단순히 성별 연령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의 다양성을 의미한다"며 "서로 다른 시각이 충돌하고 토론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진짜 견제와 조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