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책임이 무거워지면서 기업 거버넌스에 정답을 구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거버넌스란 무엇일까. 오랜기간 재무·회계 전문가로 다양한 기업 사외이사로 활동해 온 최종학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외이사(사진) 최근 더벨과 만나 "기업 거버넌스에 정답은 없다"고 말했다. 이사회가 특정 시기 어떤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환경 변화에 따라 예상치 못한 일로 이어질 수 있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로 20년째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최 사외이사는 베스트셀러 '숫자로 경영하라' 시리즈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경영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같은 학교 같은 학과 석사 과정 거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이사회 합류 전에도 다양한 자산운용사를 비롯해 풀무원과 아모레퍼시픽, 큐브엔터 등 여러 상장사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한 바 있다.
최 사외이사는 인터뷰 시작과 함께 이사회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사회가 자기 나름대로 회사와 주주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고 하지만 그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생각지 못한 변수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삼성전자가 과거 HBM 개발 조직을 축소키로 한 결정은 지금 어떤 평가를 받을까. 스마트폰 시장이 형성되던 시기 스펙보다 디자인을 강조한 LG전자의 결정은 어떤가.
거버넌스를 잘 구축했다고 하더라도 사고가 일어나는 일도 있다. 한화오션의 전신인 대우조선해양은 형식적 이사회 요건을 잘 갖추고 있던 기업 중 한 곳이었다. 외부 평가도 후했다. 그런데 이 기업에서 수조원 규모의 분식회계 사건이 발생했다. 모범적 거버넌스가 기업 성장을 반드시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거버넌스 면면을 보면 흠잡을 데 없지만 성장세가 주춤하거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관측되곤 한다.
[이미지=최종학 사외이사 제공] 이사회 활동을 위한 여건이 늘 충분한 것도 아니다. 사외이사는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구축했을 뿐 모든 분야에 정통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사회 안에서 취득할 수 있는 정보양도 제한적이다. 최근 연이은 상법 개정으로 주주 권리가 강화하면서 이사회 판단들이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점도 상당한 부담이다. 따지고 보면 이사회 활동을 둘러싼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사회에 전문성이 없으면 곤란할 수밖에 없다.
최 사외이사는 "젊었을 때는 회계라는 학문이 명확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니 이 학문 영역에서도 뚜렷한 정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기업가치를 측정한다고 하는데 미래를 예측한다는 게 얼마나 불확실한 작업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라면서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사외이사가 전문성조차 갖추고 있지 않는다면 이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 거버넌스는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을 위한 화두이지 경영 결과를 보증하는 장치가 아니란 뜻과 일맥상통한다.
오랜기간 회계학에 천착해 온 만큼 그는 회계 전문가로 이사회에 합류하곤 한다. 풀무원 재직 시 해외 투자에 상당한 재원이 투입된 적이 있었다. 당시 경영진은 청사진만을 바라보고 자금 조달 드라이브를 세게 걸었는데 최 사외이사를 포함한 일부 이사들이 재무 건전성 유지를 이유로 제동을 건 적이 있었다. 사외이사 역할은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지원'으로 대별되는데 이 역할을 소화하려면 전문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이 일었을 때 아모레퍼시픽 역시 유사한 회계처리 방식을 하고 있었는데 향후 시장에 오해가 없도록 재무 담당 임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공시 문구를 고민하던 시간도 있었다. 최 사외이사는 "이사회가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기 위해서는 회사 측의 역량도 중요하다"면서 "사외이사와 시장 간 커뮤니케이션을 효과적으로 취하는 것도 이사회 기능을 높이기 위한 요소"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몸담았던 기업 대부분은 오너 기업이 많았다. 현재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미래에셋자산운용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에셋운용은 오너 개인에 지배력이 집중돼 있는 비상장 금융회사다. 오너 지배력이 확고하기 때문에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고민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해외 시장에서 어떤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을까 질문부터 그룹 전체 경영 쇄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까지 주제가 다양하다.
최 사외이사는 "오너 경영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듣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속속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주변 목소리를 듣고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각 기업 사정이 제각각이고 기업을 구성하고 있는 인물도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라는 건 없지만 적어도 판단 미스를 줄이기 위해선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상법 개정 여파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최 사외이사는 "향후 오랜기간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해외 투자 전략을 두고 주주가 이익 침해를 주장하면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라고 되물으면서 "상법 개정안 자체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를 집행하는 단계에서는 당분간 상당한 혼란이 불가피할 수 있다. 다만 앞으로 이사회의 경영 판단이 더 조심스러워지고 다양한 요소를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